아버지는 서울에서 약사였으나, 미국 이민후 일용노동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홀리스틱 의학 : 러스크 재활센터에서 제시한 치료법으로 육체적 장애를 극복하는 것과 동시에 정신적 치료도 함께 병행하는 방법
척수 부상 환자에게 휠체어는 매우 중요하다, 딱 맞다면 재활에 적극 도움이 되고 맞지 않는 휠체어는 급속도로 척수부위를 악화시킨다.
1970년대의 미국 이민자 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한국의 사람이 매년 2만명씩 미국의 노동자 계층으로 전락했으며, 이승복의 부모도
마찬가지 였다.
딱히 마음을 둘곳없던 초등학생 이승복은 한인교회를 좋아하게 되고, 여기서 우연치 않게 보게된 체조에 빠져들게 된다.
이승복의 어머니는 장사에 수완이 발달한 사람이었고, 엄청난 적응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단지 줄을 서서 먹는 Take out 커피전문점을 3개월간 졸라서 영어도 부족하지만 덜컥 계약을 하였다.
이승복은 오로지 자신의 몸은 체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일요일에는 철저히 휴식을 취했다.
결국 이승복은 국가대표의 꿈에 근접하였으나, 연습과정에서 무리한 동작을 수행하던중 턱이 먼저 바닥에 부딪히며, 척수 손상을
입었다. 9개월 뒤 그는 TV에서 동료들이 올림픽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꼈고 슬픔을 느꼈으며, 이것이
그의 인생에 1막이 끝난 순간이었다.
척수의 번호가 그 상태를 말해준다.
C1~C2를 다치면 목 이하 호흡에도 마비가 온다.
C3~C4는 성기능 및 대부분의 상/하반신 기능이 마비된다.
C7~C8은 이론적으로는 어깨 이상과 팔은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 이하는 마비.
재활 병동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3개월 이상이 되면 방문객이 끊어지게 된다. 이때부터 굉장한 존재감의 상실에 대한 슬픔을 느낀다.
물리치료과정은 굉장히 힘들다. 인간으로서 마지막으로 남은 자존심까지 침해당하는 기분이다. 정말 배가 고픈데, 먹고싶은걸 제대로
먹지 못하고 줄줄 흘린다고 생각해보라, 샤워/ 양치질/ 용변보는 일..그 모든걸 보조자들이 쳐다보고 있다고,
정말 견디기 힘든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물리치료를 하기로 한 이상 빨리 혼자 스스로의 힘으로 그런것을 해 내는것 말고 다른 방안은 없다.
재활 과정은 계란후라이 하나를 할때도 그에게 섬머솔트를 할때 만큼의 집중력을 원했다.
척수환자들의 수명이 길지 않은 이유는 중추신경의 절단이 장기곳곳에 영향을 주어 건강악화로 인한것이 많다.
재활 과정에서 고교 정규과정을 소화하는 복지시스템으로 학업을 진행할 수 있었고, 괜찮은 대학을 들어갈 정도의 SAT 점수는 보유
하고 있는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가 무얼 전공해야 하는 지는 몰랐다.
그때 자신의 몸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연구하다가, A World to Care For(돌봐야 할 세상)이란 책을 읽고, 의학도의 꿈을 키운다.
만약 저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싶다면 작은 인형 하나만 보내주세요. " 감사를 사양하는 가장 아름다운 거절방법" - 러스크 박사 -
"서머솔트를 하다가 목뼈를 부러뜨린 건 분명히 내가 한 일이었다. 그 시간에 하느님은 내 옆에서 내가 뛰어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셨다. 하느님은 마음만 먹으면 내 몸을 좀더 높이 띄울수도 있었고, 가까스로 손으로 땅을 짚게 만들어 큰 사고를 피하게 할 수도 있었다. 왜 막지 않으셨을까? 나는 하느님의 자식인데, 자식을 다치는걸 왜 보고만 계셨을까?
하느님은 내가 다르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셨던 것이다. 오로지 체조에 목숨을 걸고 금메달 하나만 바라보며 부모님속을 썩이는 이승복이 아니라 낮선곳에서 새롭게 일어선 이승복 그런 모습이 보고싶어 나를 다치도록 그냥 내버려 둔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후에는 더 큰 계획을 준비해두고 계신지도 몰랐다"
뉴욕대에 과거 코치의 추천서와 재활보조자의 추천서를 바탕으로 뉴욕대 의대에 합격하고, 이때 우연치 않게 학교에서 네비게이토교회의
유대인에게 이끌림을 받아 영접하게 된다.
네비게이토란 도스트로트먼이 창시한 교회로, 최초 해군에서 시작하여 NAVY라는 항해사라는 의미에서 발전한 이름이다.
네비게이토의 목적은 영접을 하게하는것이 목적이므로 성경공부와 적극적 선교활동이 뒷 바침 되어야 했다.
뉴욕대에서 4년간의 로맨스 언어(프랑스, 이태리, 스페인)를 공부하고 4년뒤의 진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메디컬 스쿨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너무 많은 주위의 반대로 결국 콜롬비아대학의 공중보건대학원에 진학을 하게된다. 이또한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했고, 역시 그것이 있었다.
"현실에 충실하되 가슴에는 불가능한 꿈을 품어라!!"
공중보건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던중 학과장과의 면담에서 넌 의사가 될 수 있다라는 말을 최초로 듣게 되고, 힘을 얻는다.
의사가 되기위해 점수나 서류는 문제가 없었다. 단지 장애가 방해물이었을뿐, 면접지원은 30개 대학에 하였고, 그 중8개가 면접을 허락했고,
그 면접들의 분위기는 발가벗은 아이하나를 가운데 두고 돌과 화살과 욕을 하는 분위기 였다.
결국 그는 다트머스 대학의 200년 역사상 최초의 사지마비 의사가 된다.
이승복은 다트머스 의대에서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가 제안한 휠체어 체험수업은 매우 중요한 의대의 한 과정이 되었다.
바로 장애를 가진 이들의 좌절감과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었다.
인턴은 하버드 의대에서 보냈고 첫해에 그해의 인턴에 뽑히게 된다.
자신의 재능이 가정의학과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역시나 운명과도 같은 재활의학과에 지원하였고 그의 행선지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가
되었다.
존스홉킨스에서는 성공한 의사가 되었고, 수많은 언론과 방송의 전파를 타고 결국 SBS/KBS에 방송되면서 한국에 알려졌다.
그의 인생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8.0]
홀리스틱 의학 : 러스크 재활센터에서 제시한 치료법으로 육체적 장애를 극복하는 것과 동시에 정신적 치료도 함께 병행하는 방법
척수 부상 환자에게 휠체어는 매우 중요하다, 딱 맞다면 재활에 적극 도움이 되고 맞지 않는 휠체어는 급속도로 척수부위를 악화시킨다.
1970년대의 미국 이민자 정책으로 인해 수많은 한국의 사람이 매년 2만명씩 미국의 노동자 계층으로 전락했으며, 이승복의 부모도
마찬가지 였다.
딱히 마음을 둘곳없던 초등학생 이승복은 한인교회를 좋아하게 되고, 여기서 우연치 않게 보게된 체조에 빠져들게 된다.
이승복의 어머니는 장사에 수완이 발달한 사람이었고, 엄청난 적응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단지 줄을 서서 먹는 Take out 커피전문점을 3개월간 졸라서 영어도 부족하지만 덜컥 계약을 하였다.
이승복은 오로지 자신의 몸은 체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일요일에는 철저히 휴식을 취했다.
결국 이승복은 국가대표의 꿈에 근접하였으나, 연습과정에서 무리한 동작을 수행하던중 턱이 먼저 바닥에 부딪히며, 척수 손상을
입었다. 9개월 뒤 그는 TV에서 동료들이 올림픽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모습을 보며 희열을 느꼈고 슬픔을 느꼈으며, 이것이
그의 인생에 1막이 끝난 순간이었다.
척수의 번호가 그 상태를 말해준다.
C1~C2를 다치면 목 이하 호흡에도 마비가 온다.
C3~C4는 성기능 및 대부분의 상/하반신 기능이 마비된다.
C7~C8은 이론적으로는 어깨 이상과 팔은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 이하는 마비.
재활 병동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3개월 이상이 되면 방문객이 끊어지게 된다. 이때부터 굉장한 존재감의 상실에 대한 슬픔을 느낀다.
물리치료과정은 굉장히 힘들다. 인간으로서 마지막으로 남은 자존심까지 침해당하는 기분이다. 정말 배가 고픈데, 먹고싶은걸 제대로
먹지 못하고 줄줄 흘린다고 생각해보라, 샤워/ 양치질/ 용변보는 일..그 모든걸 보조자들이 쳐다보고 있다고,
정말 견디기 힘든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물리치료를 하기로 한 이상 빨리 혼자 스스로의 힘으로 그런것을 해 내는것 말고 다른 방안은 없다.
재활 과정은 계란후라이 하나를 할때도 그에게 섬머솔트를 할때 만큼의 집중력을 원했다.
척수환자들의 수명이 길지 않은 이유는 중추신경의 절단이 장기곳곳에 영향을 주어 건강악화로 인한것이 많다.
재활 과정에서 고교 정규과정을 소화하는 복지시스템으로 학업을 진행할 수 있었고, 괜찮은 대학을 들어갈 정도의 SAT 점수는 보유
하고 있는 수준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그가 무얼 전공해야 하는 지는 몰랐다.
그때 자신의 몸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 연구하다가, A World to Care For(돌봐야 할 세상)이란 책을 읽고, 의학도의 꿈을 키운다.
만약 저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싶다면 작은 인형 하나만 보내주세요. " 감사를 사양하는 가장 아름다운 거절방법" - 러스크 박사 -
"서머솔트를 하다가 목뼈를 부러뜨린 건 분명히 내가 한 일이었다. 그 시간에 하느님은 내 옆에서 내가 뛰어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계셨다. 하느님은 마음만 먹으면 내 몸을 좀더 높이 띄울수도 있었고, 가까스로 손으로 땅을 짚게 만들어 큰 사고를 피하게 할 수도 있었다. 왜 막지 않으셨을까? 나는 하느님의 자식인데, 자식을 다치는걸 왜 보고만 계셨을까?
하느님은 내가 다르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셨던 것이다. 오로지 체조에 목숨을 걸고 금메달 하나만 바라보며 부모님속을 썩이는 이승복이 아니라 낮선곳에서 새롭게 일어선 이승복 그런 모습이 보고싶어 나를 다치도록 그냥 내버려 둔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후에는 더 큰 계획을 준비해두고 계신지도 몰랐다"
뉴욕대에 과거 코치의 추천서와 재활보조자의 추천서를 바탕으로 뉴욕대 의대에 합격하고, 이때 우연치 않게 학교에서 네비게이토교회의
유대인에게 이끌림을 받아 영접하게 된다.
네비게이토란 도스트로트먼이 창시한 교회로, 최초 해군에서 시작하여 NAVY라는 항해사라는 의미에서 발전한 이름이다.
네비게이토의 목적은 영접을 하게하는것이 목적이므로 성경공부와 적극적 선교활동이 뒷 바침 되어야 했다.
뉴욕대에서 4년간의 로맨스 언어(프랑스, 이태리, 스페인)를 공부하고 4년뒤의 진로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메디컬 스쿨에 진학하고 싶었으나
너무 많은 주위의 반대로 결국 콜롬비아대학의 공중보건대학원에 진학을 하게된다. 이또한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했고, 역시 그것이 있었다.
"현실에 충실하되 가슴에는 불가능한 꿈을 품어라!!"
공중보건대학원에서 열심히 공부하던중 학과장과의 면담에서 넌 의사가 될 수 있다라는 말을 최초로 듣게 되고, 힘을 얻는다.
의사가 되기위해 점수나 서류는 문제가 없었다. 단지 장애가 방해물이었을뿐, 면접지원은 30개 대학에 하였고, 그 중8개가 면접을 허락했고,
그 면접들의 분위기는 발가벗은 아이하나를 가운데 두고 돌과 화살과 욕을 하는 분위기 였다.
결국 그는 다트머스 대학의 200년 역사상 최초의 사지마비 의사가 된다.
이승복은 다트머스 의대에서 유명인사가 되었고, 그가 제안한 휠체어 체험수업은 매우 중요한 의대의 한 과정이 되었다.
바로 장애를 가진 이들의 좌절감과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었다.
인턴은 하버드 의대에서 보냈고 첫해에 그해의 인턴에 뽑히게 된다.
자신의 재능이 가정의학과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역시나 운명과도 같은 재활의학과에 지원하였고 그의 행선지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가
되었다.
존스홉킨스에서는 성공한 의사가 되었고, 수많은 언론과 방송의 전파를 타고 결국 SBS/KBS에 방송되면서 한국에 알려졌다.
그의 인생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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