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군시대 : 제정일치(경제와 정치가 하나)의 시대였으며, 주로 거주지는 골짜기(배산임수: 생존에 유리)에 위치하였으며, 부족의 결집을
위한 토속신앙을 가지고 부족을 지배하는 수준.
위한 토속신앙을 가지고 부족을 지배하는 수준.
변곡 포인트 : 구리가 발견되면서 석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진입하게 되고, 농경기술이 발달되자 거주지의 이전이 발생하여 넓은 들로
나오게 됨. 토속신앙만으로 부족을 지배하는것이 힘들게 되고, 사람들은 좀 더 크고 힘있는 법적규약 하의 생활을 요구하게 됨. 이렇게
하여, 열국시대로 진입하게 됨. 만주까지 포함하면 수백이 넘었던 것으로 예상
나오게 됨. 토속신앙만으로 부족을 지배하는것이 힘들게 되고, 사람들은 좀 더 크고 힘있는 법적규약 하의 생활을 요구하게 됨. 이렇게
하여, 열국시대로 진입하게 됨. 만주까지 포함하면 수백이 넘었던 것으로 예상
- 열국시대 :
1. 부여 : 만주에서 일어나 장백산 일대에 거주, 문화의 수준이 가장 높았음.
매우 번성한 나라였으나, 한족(중국본토민족)과 선비족(중국 고대민족)의 침입으로 국력이 약해지고, 결국 내란으로 동북의
두 부여로 나뉘어져, 후에 고구려에 편입됨.
두 부여로 나뉘어져, 후에 고구려에 편입됨.
2. 읍루 : 러시아 지방에 거주, 열국시대 나라중 가장 문화수준이 낮은 나라.
3. 옥저 : 읍루의 남쪽, 함경도 지방, 산맥을 등지고 바다를 바라보는 좁고 긴 나라. 읍루의 침략을 많이 받음. 고구려와 문화가 비슷
4. 졸본 : 장백산 골짜기에 조그만 나라. 후에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할때 기초가 되는 나라, 이유는 작고 힘든 환경으로 인해 침략이
잦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군대가 존재하였음.
5. 기자조선 : 황해도 평안도 지방의 나라. 시초는 은나라 왕족이었던 기자가 은나라가 망할때 넘어와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평양
으로 정하고 8조법(살인,상해 등)으로 나라를 다스림 기자가 나라를 만들었다는 의견에는 의견이 분분하나, 아마도
같이 받아주고 살았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함. 우리의 성품때문에... 하지만 이러한 것 모두 추측일 뿐이고 실제로 중국
잦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강한군대가 존재하였음.
5. 기자조선 : 황해도 평안도 지방의 나라. 시초는 은나라 왕족이었던 기자가 은나라가 망할때 넘어와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평양
으로 정하고 8조법(살인,상해 등)으로 나라를 다스림 기자가 나라를 만들었다는 의견에는 의견이 분분하나, 아마도
같이 받아주고 살았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함. 우리의 성품때문에... 하지만 이러한 것 모두 추측일 뿐이고 실제로 중국
문화가 흘러들어온것으로 인한 경제의 변동이 가장 큰 사실이며 핵심 포인트. 실제로 후에 부여를 망하게 하는 주도
적인 역할을 기자조선이 하고, 그 핵심은 중국의 경제문화로 인한것. 하지만 결국 이러한 민족적 이질감으로 인해
졸본이 민족동질성에 목적을 두고 고구려를 세우는데 핵심적인 이유제공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적인 역할을 기자조선이 하고, 그 핵심은 중국의 경제문화로 인한것. 하지만 결국 이러한 민족적 이질감으로 인해
졸본이 민족동질성에 목적을 두고 고구려를 세우는데 핵심적인 이유제공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6. 예. 맥 : 옥저의 남쪽에 있고, 대관령을 사이에 두고 있었음
7. 삼한 : 한강이남에 있는 지역으로, 마한(충청,전라) 진한(경상도), 변한(마,진한 사이의 조그만), 그리고 변한의 남쪽 한 모퉁이에
가락(가야 혹은 가락)이 있었음. 가락이나 변한등 삼한을 구성하는 나라들은 부족체의 성격이 강했는데, 이는 중앙집권화가
아직 체계화 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 이것은 대륙에서 나오는 문화문물을 북쪽지방이 먼저 흡수하여 발전시켰다는
것을 의미.
가락(가야 혹은 가락)이 있었음. 가락이나 변한등 삼한을 구성하는 나라들은 부족체의 성격이 강했는데, 이는 중앙집권화가
아직 체계화 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 이것은 대륙에서 나오는 문화문물을 북쪽지방이 먼저 흡수하여 발전시켰다는
것을 의미.
변곡 포인트 : 열국시대는 위에서 언급한 나라이외도 수많은 나라가 존재 했으며, 서로 다투고 싸웠다. 이러기를 거의 천년을 지속
하였고, 약소국이 사라져 가면서 마침내 삼국시대를 만들어 내게 된다.
하였고, 약소국이 사라져 가면서 마침내 삼국시대를 만들어 내게 된다.
열국시대가 주는 시사점 : 사람과 사람사이의 붙들어 매는 힘을 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단체를 적게하는 것이 좋다. 이것은
비즈니스에도 마찬가지, 통제력을 가지려면 부서를 줄여야 한다는 것을 알려줌.
비즈니스에도 마찬가지, 통제력을 가지려면 부서를 줄여야 한다는 것을 알려줌.
또한 이 열국시대에 우리민족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사건이 2개가 일어나는데, 그 하나가 한사군
(중국 한무제가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4군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함. 이때 3군은 우리민족의
반항으로 얼마 안가 쫒겨 났으나, 낙랑군은 4백년간 다스리게됨.)과 위에서도 언급한 기자조선의 중국문화의
영향이다. 이때 수많은 제도와 경제시스템이 들어왔으며, 유교라는 사상또한 대륙으로 부터 넘어오게 된다.
(중국 한무제가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4군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함. 이때 3군은 우리민족의
반항으로 얼마 안가 쫒겨 났으나, 낙랑군은 4백년간 다스리게됨.)과 위에서도 언급한 기자조선의 중국문화의
영향이다. 이때 수많은 제도와 경제시스템이 들어왔으며, 유교라는 사상또한 대륙으로 부터 넘어오게 된다.
열국시대를 큰 시대의 모판이 되었다고 해서 모판시대라 하고, 1,000년의 모판시대가 지난 후 삼국시대가 열리는데, 이는 지리적으로
산맥의 영향으로 인해 나뉘어짐이 큰 이유이다. 그 중 신라는 지리적으로 대륙의 문화를 가장 늦게 받아 인문 발달이 가장 늦었고,
아래의 일본의 침략과 서쪽의 마한의 지배를 받아왔다. 혁거세가 나라를 세운이후 삼국중 늘 약소국의 위치에 있었고, 이러한 것때문에
신라 역사에는 늘 침입이라는 이벤트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왜인 침입에 대응한 기질로 인해 삼국통일이 얼핏보기에 자연스럽지 못한
신라에 의해 되어지는 이유가 되었다. 백제는 넓은 평야와 마한의 문화 그리고 중국과 일본과의 교역으로 풍성한 나라였으며, 정과 문의
나라였다.
하지만 무언가 굳센 힘은 부족한 나라였다. 고구려는 주몽(동명성왕)이 졸본을 기초로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세웠으므로 기세가 굳세고
강한 나라였다. 주몽이란 뜻이 활을 잘 쏨을 뜻하지만, 이러한 한 사람만의 나라였다면 고구려가 훌륭하지는 않았을 터, 분명 훌륭한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 후에 비참한 역사로 인해 그의 문화는 거의 사라졌지만, 결국 이것을 살려내는것 또한 우리 후대의 임무이다.
산맥의 영향으로 인해 나뉘어짐이 큰 이유이다. 그 중 신라는 지리적으로 대륙의 문화를 가장 늦게 받아 인문 발달이 가장 늦었고,
아래의 일본의 침략과 서쪽의 마한의 지배를 받아왔다. 혁거세가 나라를 세운이후 삼국중 늘 약소국의 위치에 있었고, 이러한 것때문에
신라 역사에는 늘 침입이라는 이벤트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왜인 침입에 대응한 기질로 인해 삼국통일이 얼핏보기에 자연스럽지 못한
신라에 의해 되어지는 이유가 되었다. 백제는 넓은 평야와 마한의 문화 그리고 중국과 일본과의 교역으로 풍성한 나라였으며, 정과 문의
나라였다.
하지만 무언가 굳센 힘은 부족한 나라였다. 고구려는 주몽(동명성왕)이 졸본을 기초로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세웠으므로 기세가 굳세고
강한 나라였다. 주몽이란 뜻이 활을 잘 쏨을 뜻하지만, 이러한 한 사람만의 나라였다면 고구려가 훌륭하지는 않았을 터, 분명 훌륭한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 후에 비참한 역사로 인해 그의 문화는 거의 사라졌지만, 결국 이것을 살려내는것 또한 우리 후대의 임무이다.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민족이 합쳐져 로마시대를 이끌어내었고, 켈트.앵글로색슨.데인.노르만 등의 여러민족이 싸운끝에 대영국민이
나왔고, 황화 양자강 유역의 셀수없이 많은나라가 합쳐져 아시아 절반을 통일한 중국이 나왔듯이 우리 삼국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한
나라가 되었다. 이를 살펴보자.
나왔고, 황화 양자강 유역의 셀수없이 많은나라가 합쳐져 아시아 절반을 통일한 중국이 나왔듯이 우리 삼국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한
나라가 되었다. 이를 살펴보자.
- 낙랑 : 중국피난민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되고, 이 두개가 조선이 되어 나라 한 복판에 4개의 군을 세워지배하려 하였고, 이중 3개는
얼마 못가 소멸되었지만 하나가 남은것이 400년을 지배하였는데, 그 것이 낙랑군. 이 낙랑을 잡기위해 힘을 키운것이 바로
고구려였다.
고구려였다.
- 또한 열국시대에 또 커다란 변화는 바로 불교였다. 불교는 공식적으로 고구려 소수림왕때 들어왔고, 백제는 3년후 신라는 30년 후에
도입되었다고 나오지만 민간에는 훨씬 더 먼저 들어와 있었다.
도입되었다고 나오지만 민간에는 훨씬 더 먼저 들어와 있었다.
- 열국시대에 유교가 왔었고, 삼국시대에 불교가 왔었다.
- 사실 민족통일이 가능했었던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이 유교와 불교가 갖는 특성때문이다. 중국도 이때문에 가능했을까?
두 종교 모두 각 집단의 이기심이 목적이 아닌 한 중생으로의 삶으로 승화시켜 버리기 때문에 전쟁에 이겨도 중생 져도 중생이니,
어찌 심각하게 싸우기가 힘든 것이였다. 알겠지만 세상 수많은 전쟁은 거의 모두 종교가 원인이 되었으면 두말하면 잔소리이니.
두 종교 모두 각 집단의 이기심이 목적이 아닌 한 중생으로의 삶으로 승화시켜 버리기 때문에 전쟁에 이겨도 중생 져도 중생이니,
어찌 심각하게 싸우기가 힘든 것이였다. 알겠지만 세상 수많은 전쟁은 거의 모두 종교가 원인이 되었으면 두말하면 잔소리이니.
- 삼국시대의 정치는 할 말이 없지만, 민족 종교로서의 불교는 큰의미를 가지며 많은 예술품을 남기게 하였다.
- 이러한 삼국시대는 복잡하게 흘러간다.
1. 고구려가 강성하여, 통일 할 듯한 상황이었다.
2. 하지만 중국의 압박이 심하고, 신라가 강성해져, 삼국시대는 좀 더 복잡해졌다.
3. 신라와 백제가 한편으로 고구려를 굴복시키려 하기도 했고,
4. 고구려와 백제가 한편으로 신라를 굴복시키려 하기도 했고,
5. 백제가 일본과 한편으로 신라를 굴복시키려 하기도 했고,
6. 결국 신라는 당나라를 등에 없고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켜 버렸다.
- 2천년을 이끌어오며 기대해온 통일시대는 결국 당나라 문화와 제도로 물들어버린 어찌보면 죽은 혼의 통일 시대였다.
당연히 나라의 영역도 임진강 남쪽으로 하게 되니 이는 변명할 여지 없는 것이다. 나라를 팔아 통일을 한것이나 다름없다.
- 이는 그리스의 모습과도 비슷한데 찬란한 문화의 아테네, 스파르타, 테헤 등은 서로 싸우다, 결국 북방 오랑캐라 여겼던 마케도니아로
하여금 손을 뻗치게 만들어 모두 망해 버렸다.
- 통일신라는 바로 동쪽의 또하나의 그리스 였다.
- 삼국시대가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고구려의 실패다. 만약 고구려가 망하지 않았다면, 만주와 조선을 하나로 연결한 대국이
이루어졌을것이며, 이렇게 되었다면, 세계역사는 조금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신라는 못했지만, 고구려는 능히 그럴 있었던 나라였다.
왜냐면 그 후에 금.청나라 그리고 문화수준이 훨씬 뒤떨어진 여진도 했던 그 일을 고구려가 못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 이는 신라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대륙으로 뻗어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지리적위치에 있었음은 물론이고, 또한 신라가 남의 힘을 얻어
겨우 나라를 통일 한 지금의 역사를 보자면 한 숨이 나온다는 뜻에서 고구려가 망한것이 바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쓰라린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겨우 나라를 통일 한 지금의 역사를 보자면 한 숨이 나온다는 뜻에서 고구려가 망한것이 바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쓰라린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고구려는 갑자기 망한것이다. 병약한 자가 빌빌거리다 죽은것이 아닌 갑자기, 그 이유는 북쪽의 수.당의 횡포로 부터 한반도를 지켜냈고,
내부의 낙랑을 쫒아내기 위해 싸웠으며, 이 과정에서 결국 신라에게 당한것이다. 그러니 통일신라의 절반 이상은 바로 고구려가 지켜냈다고
할 수 있다.
내부의 낙랑을 쫒아내기 위해 싸웠으며, 이 과정에서 결국 신라에게 당한것이다. 그러니 통일신라의 절반 이상은 바로 고구려가 지켜냈다고
할 수 있다.
- 결국 신라는 과한값(고구려의 멸망)을 당에게 주고 통일을 샀으나, 참 보잘것 없는 통일이었다. 지금 경주의 신라문화의 유물을 세계의
손님들이 가볍게 지나가며 칭찬하지만, 만주와 개마고원과 발해.동해를 다 가졌을 그 기상으로 세워졌을 문화에 비한다면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니리라.
손님들이 가볍게 지나가며 칭찬하지만, 만주와 개마고원과 발해.동해를 다 가졌을 그 기상으로 세워졌을 문화에 비한다면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니리라.
- 이러한 통일신라에도 불교의 영향으로 나온 화랑도가 대단하였고, 또한 최치원이 유.불.선 삼교의 제대로 된 참의미를 화랑도는 다
가지고 있었다.
가지고 있었다.
- 하지만 이러한 것도, 모두 당나라의 영향으로 대가 끊어지고 정치는 혼란스러워 지니 결국 망국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 하지만 고구려는 계속해서 그들의 땅을 찾기 위한 노력을 펼쳤으니, 발해는 사실상의 고구려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이러한 발해도 거란 여진 몽고의 사움터가 되었고, 결국 지쳐 압록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왔고, 결국 남은것은 다 사라져 버렸다.
- 삼국시대의 역사는 실패의 역사에 가깝다. 제대로 되었어야 할 통일이 그러하지 못했고, 또한 발전해야 할 문화도 제대로 되지 못하여서
그렇다.
그렇다.
- 신라 마지막에 정치적으로 타락하고 백성의 뜻은 어지러워지고, 사회는 복잡했다. 진성여왕때 양길은 북쪽에서 궁예를 부하로 일어났고,
견훤은 백제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후 백제를 일으켰다. 양길은 얼마 못가 궁예에게 대패하여, 궁예는 후 고구려를 일으켜 냈다.
- 결국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나라 신라는 결국 다시금 후 삼국시대로의 전환을 막지 못하게 되었다. 결국 말은 바꾸었지만, 제대로된
민중의 뜻은 바꾸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 궁예 : 왕족의 서자 출신이었고, 그로 인해 절간을 전전하며 역경속에 커왔다. 궁예가 의미있는 존재가 된 것은 바로 중국 냄새나는
신라의 옛것을 모두 버리고, 우리나라 고유식으로 평양에 서울을 세울계획을 하였고, 여러 언어를 배우게 한 것도 만주 옛터를
목표로 두었기해 행한 행동이었고, 후 고구려라고 부름도 고구려의 뜻을 잇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그의 성격에 사나움이
끼어있어 그는 피지도 못하고 져버린 영웅이었다.
신라의 옛것을 모두 버리고, 우리나라 고유식으로 평양에 서울을 세울계획을 하였고, 여러 언어를 배우게 한 것도 만주 옛터를
목표로 두었기해 행한 행동이었고, 후 고구려라고 부름도 고구려의 뜻을 잇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그의 성격에 사나움이
끼어있어 그는 피지도 못하고 져버린 영웅이었다.
- 하지만 궁예의 이러한 뜻은 결국 왕건에게로 이어져 계속 되게 된다. 일개 군인의 신분으로 임금자리까지 가는 재능과 도량을 가졌는데,
궁예에게 붙어서 힘을 키운후 그 하는 일이 점점 사납고 망측해지자, 몸을 피했다가 인심을 모으고 궁예를 내쫓고 나라를 얻게 되었다.
궁예에게 붙어서 힘을 키운후 그 하는 일이 점점 사납고 망측해지자, 몸을 피했다가 인심을 모으고 궁예를 내쫓고 나라를 얻게 되었다.
- 왕건의 꿈은 결코 신라와 견훤의 백제를 얻는것이 아니었다. 바로 북으로 진군하자는 것이 그의 참 뜻이었다.
- 수도를 송도로 정하였으나, 평양을 정비하면서 발해의 민족을 껴안으려 노력했고, 이 발해 민족을 위해 거란과 등을 지는 초 강수를
두기도 하였다.
- 이렇게 왕건(고려 태조)은 중국문물을 배제하고 민족정신을 키우려 힘썼다. 이를 위해 만든것이 바로 훈요십조이며, 이는 정책운영의
방향까지 나타낸 것이었다.
방향까지 나타낸 것이었다.
- 이 훈요십조와 함께 불교와 팔관회(토속신앙에게 지내던 제사)를 두었었다. 팔관회는 불교와 많은 영향이 있었다.
- 태조가 불교를 중심에 둔 것은 신라 백성의 핵심 신앙이었던 불교를 유지코저 하였던 것이다. 갑자기 자르면 반발이 심해질 테니.
- 결국 태조는 불교를 가지고 민심을 하나로 뭉치고, 시대의 사조인 유교를 정치에 결합하여 정치기구를 튼튼히 하고, 신라에서 내려오는
화랑도 정신등의 민족정신을 가지고 만주지방까지 도달하려고 하는 큰 뜻을 품었었다. 하지만 어느정도 키우기는 하였으나 결국 그도
열매는 맺지 못하였다.
화랑도 정신등의 민족정신을 가지고 만주지방까지 도달하려고 하는 큰 뜻을 품었었다. 하지만 어느정도 키우기는 하였으나 결국 그도
열매는 맺지 못하였다.
- 이렇게 민족정신이 부흥하던 시기를 밀물 시대라고 하면, 그 세력은 혜종 정종 두임금을 지나고 광종에 이르러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유교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유교 때문이다.
- 중국을 귀인시 하였고, 과거법을 실시하게 되었는데, 이 과거법은 유교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성종때 최승로가 28조 상소문을 올려 불교를 몰아내고 유교를 들이자고 하였고, 이를 그대로 수행했는데, 결국 이말은 나라야 어찌
되었거나 민중이야 어찌되거나 이대로 영원히 해먹자는 말이며, 이때 바로 사대주의 가 생기고 현상유지가 생겨나게 되었을 것이다.
되었거나 민중이야 어찌되거나 이대로 영원히 해먹자는 말이며, 이때 바로 사대주의 가 생기고 현상유지가 생겨나게 되었을 것이다.
- 이렇게 민족의 썰물시대에 거란이 쳐들어온다.
- 거란은 발해를 없애버린 사나운 민족, 고려의 왕들이 선왕의 뜻에 따라 북벌을 시행하였다면, 크지 못했을 거란이, 유교를 받아들이며,
선비주의에 물든 군자국노릇한다는 정책이 바로 이러한 것을 일으켰으리라.
선비주의에 물든 군자국노릇한다는 정책이 바로 이러한 것을 일으켰으리라.
- 그나마 서희가 고려시대에 기억될만한 담판을 적진 한가운데에서 이뤄 내었지만, 이로서는 부족하다. 훌륭한 무장이었던 김숙흥.
양규와 같은 혼이 있고, 강감찬 같은 훌륭한 장수가 그나마 기억할 만한 인물이다.
양규와 같은 혼이 있고, 강감찬 같은 훌륭한 장수가 그나마 기억할 만한 인물이다.
- 거란의 침입이 스스로 물러간 뒤 몇 십년간의 고려의 태평시대와 문물의 발달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해동공자라 불리는
최충이 이때 나게 된다.
최충이 이때 나게 된다.
- 거란이 점점 쇠퇴해지자, 만주지역에서 여진족이 그 기세를 일으킨다. 여진은 말갈의 한 종족으로, 고구려에게 지배를 받았고,
발해시대에는 발해의 지배를 그리고 거란에게 지배를 받은후, 거란의 기세가 약해지자 세상에 나왔으나, 고려는 과거 조선의 후예를
자처하던 여진이었으므로, 고려의 세력이 더 앞서 있었음은 당연하였다.
발해시대에는 발해의 지배를 그리고 거란에게 지배를 받은후, 거란의 기세가 약해지자 세상에 나왔으나, 고려는 과거 조선의 후예를
자처하던 여진이었으므로, 고려의 세력이 더 앞서 있었음은 당연하였다.
- 결국 숙종때 여진의 장난을 참을 수 없어 북으로의 진군을 계획하고, 선두에 윤관을 세웠지만 실패하고 결국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다음
세대에 넘겨주게 된다.
- 그의 아들 예종이 아버지의 뜻을 받아 윤관을 다시 세워 나름의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두만강을 넘어 간도지방까지 세를 확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되었던 것이다.
- 하지만 이때 역시 선비들의 사대주의가 그 기세를 가로막는데, 이들의 숨은 뜻은 나하나 배부르자는 현 시대의 정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니라.
바 없었을 것이니라.
- 여진이 다시 고려 조정에 와서 침략을 하지 않고 조공을 바칠터이니, 윤관에게 빼앗긴 9성을 돌려달라고 하자, 이때다 싶은 썩은
선비들은 당장 여진의 요청을 수락해야 한다며 강하게 주장하였다. 예종이 이를 거부하자, 출근까지 안하고 왕에게 항명하며, 또한
윤관이 병사를 일으켜 반란까지 한다고 이야기 하는데, 어찌 나라토벌에는 약해빠진 선비들이 공신 토벌에는 이리 강할 수가 있는지
정말이지 개탄 스럽다. 이리하여 예종은 어쩔 수 없이 윤관을 불러 벼슬을 깎고 그를 귀향 보냈다.
선비들은 당장 여진의 요청을 수락해야 한다며 강하게 주장하였다. 예종이 이를 거부하자, 출근까지 안하고 왕에게 항명하며, 또한
윤관이 병사를 일으켜 반란까지 한다고 이야기 하는데, 어찌 나라토벌에는 약해빠진 선비들이 공신 토벌에는 이리 강할 수가 있는지
정말이지 개탄 스럽다. 이리하여 예종은 어쩔 수 없이 윤관을 불러 벼슬을 깎고 그를 귀향 보냈다.
- 이처럼 예종의 뜻이 부러지고, 썩은 선비들의 위세가 등등한 이때, 여진이 나라를 일으켜 금이라고 칭하고, 고려를 아우의 나라로
부르는 데 까지 오니, 고려의 입장으로선 금수처럼 업신여기던 놈들이 꿈 그대로 만들어가니 이를 보고 놀람을 금치 못하였다.
부르는 데 까지 오니, 고려의 입장으로선 금수처럼 업신여기던 놈들이 꿈 그대로 만들어가니 이를 보고 놀람을 금치 못하였다.
- 예종은 훗날 시를 짓고 경서를 공부하면서 보냈다. 꿈이 깨어지고 나니 허탈하고 쓸쓸함을 견딜 수 없어 그랬을 것이다. 예종이 가고
인종이 뒤를 이었고, 한국전체의 역사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고려 인종의 반까지가 밀물(상승)의 역사이고, 고려 인종의 반 이후 부터
내려가는 역사인데, 어찌 이렇게 썩은 선비들 밖에 없었을까?
인종이 뒤를 이었고, 한국전체의 역사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고려 인종의 반까지가 밀물(상승)의 역사이고, 고려 인종의 반 이후 부터
내려가는 역사인데, 어찌 이렇게 썩은 선비들 밖에 없었을까?
- 결국 이 어둠을 걷어낼려고 시도한 난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묘청의 난이다.
- 묘청의 난 : 윤관을 귀향시킴으로서 실패한 북벌을 두고, 두 파가 있었으니, 금나라도 스스로의 왕을 황제라 칭하고 나라를 일으켰는데,
우리 고려도 왕을 황제로 칭하고 중국에 대항하자라는 한가지 파와, 금 따위가 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으니, 우리는 중국에게 계속
변함없이 조공을 바치자는 한 파가 맞붙게 되었다.
우리 고려도 왕을 황제로 칭하고 중국에 대항하자라는 한가지 파와, 금 따위가 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으니, 우리는 중국에게 계속
변함없이 조공을 바치자는 한 파가 맞붙게 되었다.
- 이러한 맞붙음은 인종에 와서 생긴것이 아니고, 예전부터 있어 왔던 것이다. 결국 이 두 파의 형태는 만주로 가자는 파와 그대로 있자라는
파의 싸움이 되었다.
파의 싸움이 되었다.
- 결국 이러한 대립은 서경천도 사건으로 벌어지기 시작한다.
- 이 배경은 다음과 같다. 신라 말기때 부터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게 되면 국운이 상승하여 주변국이 조공을 바치러 오게 된다. 물론
이것은 미신이었으나, 그 시대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믿음이었고, 당연히 이러한 믿음의 실체는 많은 국민들이었다. 이것을 이용
하려 한것이 북벌론을 주장하는 파였다.
이것은 미신이었으나, 그 시대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믿음이었고, 당연히 이러한 믿음의 실체는 많은 국민들이었다. 이것을 이용
하려 한것이 북벌론을 주장하는 파였다.
- 이를 반대한 파는 당연히 유신파였으니, 이들은 수도를 옮기게 될경우 그들의 기반세력을 잃어버림을 우려한 결국 자신의 목숨부지에
목숨을 건 선비파였다. 이 유신들중 핵심인물이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이었다.
목숨을 건 선비파였다. 이 유신들중 핵심인물이 삼국사기를 저술한 김부식이었다.
- 하지만 이러한 수도 이전의 믿음 자체가 미신이었으므로, 임금조차 주저하고 있을때, 불벌론을 주장하던 묘청파 내부에서 분열이 생겨
나라를 일으켰다라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 세력은 김부식의 세력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이것이 묘청의 난이다.
나라를 일으켰다라는 소식이 전해졌고, 이 세력은 김부식의 세력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이것이 묘청의 난이다.
- 묘청의 난을 두고 신채호 선생은 조선 1천년 역사에 가장의미있는 사건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연유는 다음과 같다.
1. 유파 vs 불파
2. 한학 vs 국풍
3. 진보 vs 보수(묘청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한)
- 바로 위의 3번이 한국역사가 보수적 속박적 사상에 정복된 시초이자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채호 선생)
- 북벌이 실패한 후 고려 조정에는 난이 끊이지 않았다. 묘청의 난 이전에 이자겸의 난이 있었고, 묘청의 난 후에는 정중부의 난이 있는데,
이 정중부의 난의 배경이 고려의 유신파들이 무신을 낮춰보는 문존무비의 사상때문에 발 하였다. 유신들이 어떻게든 무신들이 권력을
취하지 못하게 하여 발생한 것이 정중부의 난이었다. 이때의 임금 이었던 의종은 놀기 좋아하고 사치하기 좋아하고 시문을 즐겼다.
- 덕택에 고려자기는 발달해서 후세에 자랑거리가 되었으나, 자기하나 깨진 접시하나에 몇 천백만원 아끼지 않는 사람은 많지만 제대로
보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보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 고려자기의 선은 민중의 창자가 주린선이며, 민족혼이 고민하는 선이고, 그 빛은 나라 운명이 슬프게 저물고 역사의 수평서는 가물
거리는 파란빛이다.
거리는 파란빛이다.
- 이러한 정중부의 난은 이의민, 경대승에 이어 최충헌이 4대 60년간 이어지는 최씨무인정권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 고려가 이처럼 쇠하고 있을때, 몽고가 쳐들어오는데, 이에 몽고의공주를 왕비로 맞이하고, 그 공주의 콧김에 벌벌떨며
살아가는 정부내신들의 모습이란, 겨우 한다는것이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버리는 이러한 행동을 한 고려 왕조, 결국 나라 구원해 달라며
새긴 팔만대장경과 수많은 돌탑은 과연 원(몽고)나라의 문화가 없다고 하는것이 맞을 건가.
- 그 돌탑아래에 숨어 숨쉬는 수십만 우리 민족의 핏 빛서린 굴욕의 세월은 어떻게 할 것인가??
- 하지만 영원은 없는 법이듯이 원나라도 세력이 쇠퇴하는 틈을타 북벌사상이 다시 고개를 들게 되었다.
- 공민왕이 원의 볼모에서 나와 임금이 되자, 원의 풍습을 다 물리쳐 민심을 살리고 압록강 근처의 여러 고을을 빼앗는다.
함경도와 평안도를 수복시켰다.
- 만약 이러한 공민왕의 기세가 다시 한번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한국역사는 또 한번 달라졌겠지만, 악덕한 신돈이 나타나 환관무리를
가까이 하다 나라를 버려버렸다.
- 이시기에 중국의 주원장은 다시 중국을 통일하고, 명나라를 세워 만주까지 다시 한번 손길을 뻗힌다.
- 하지만 고려 정국은 이러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명과 망해가는 원나라에 양다리를 걸치는 애매한 형태로 복잡한 형태를
만들고 있었다.
- 하지만 이때 줄기차게 북벌론을 주장하는 최영장군이 있었으니, 우왕 14년에 그가 북벌군을 일으킨다. 고려의 마지막 기회이자, 고구려가
망한 700년 이래 실패의 역사를 바로잡고자한 견디고 견딘 분노의 내뱉음이었다.
- 주유가 " 하늘이 나를 냈거든 어찌 또 제갈량을 냈느냐" 라고 한것처럼, 하늘이 최영을 고려의 운명으로 세우기도 했지만, 또 어찌
이성계를 내었는가
- 이 둘은 첨예하게 맞서는 사상과 마음씨를 가졌다. 진취와 보수의 싸움, 자주독립과 시대 예속적,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의리와 권리.
- 최영은 진취 자주독림 이상주의 의리에 힘을 얻어 드디어 3만 8천의 역사적인 북벌을 시작한다.
- 하지만 이러한 북벌군의 좌우 날개중 한 날개는 이성계를 써야만 하는 것이었으니, 이성계도 나름 수많은 싸움과 많은 부하를 거느려
무시할 수 없게 되고, 민중은 우매하여 아직 계몽 되지 못하였고, 당연히 이성계로 하여금 반대운동을 일으킬 좋은 기회를 준것이었다.
무시할 수 없게 되고, 민중은 우매하여 아직 계몽 되지 못하였고, 당연히 이성계로 하여금 반대운동을 일으킬 좋은 기회를 준것이었다.
- 결국 이성계는 압록강을 등지고 " 만일 천자의 화를 돋구면, 백성들에게 화가 미치리라 ~" 하며, 반란을 일으켜 격룩 최영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려는 멸망의 길로 가게 되는데, 이것이 안타까운건 다음과 같다.
이루지 못하고 고려는 멸망의 길로 가게 되는데, 이것이 안타까운건 다음과 같다.
- 스시로 소국. 소민임을 자처하였고, 우리나라의 혼을 잘라버렸으며, 고려라는 그나마 있던 자부심의 나라를 내어준 꼴이었다.
- 결국 최영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아, 조선의 창업주가 되었다. 종살이의 시작이었으고, 자유를 판 사람은 결국 모든것을 빼앗긴다라는
것을 보여준 그 사실증명의 시작이었다.
것을 보여준 그 사실증명의 시작이었다.
- 만약 최영의 무와 이성계의 지가 합쳐졌다면, 우리를 두 강남 쪽에 구겨박고 모진 운명의 시작으로는 아니었을것이다.
- 이러한 이성계가 나올 수 있었던건, 그만큼 고려의 정신이 썩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성계가 나오기 위해서는 내통하는 놈이
있어야 하는데 국민 정신이 올라가 있는 시점에는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있어야 하는데 국민 정신이 올라가 있는 시점에는 나올래야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 최영은 철원사람으로서 생긴모양이 무섭고 힘이 세었고, 맘이 곧고 착하였다. 그의 아비 유언으로"황금 보기를 돌같이 보라" 라고
하였고, 단 한번도 패하지 않은 화려한 사람이었다. 그의 나이 73에 목이 떨어졌지만, 떨어질때의 그 꼿꼿함은 정기가 서려있었다.
이때 주변국은 4천년 역사가 떨어졌을거라고하고 좋아하였다. 저자는 그만큼 이 최영장군을 한국역사에서 마지막으로 한얼을 가지고
산 사람이었다고 적고 있다.
- 고려의 망함은 신라보다 더 더럽고 조선은 고려보다 더 더럽다. 고려의 망함이 신돈의 사건이 그 한 끝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바로
불교가 썩었다는 것을 말한다.
불교가 썩었다는 것을 말한다.
- 절은 많은 돈을 가지고 세금을 내지 않았으며, 승병을 끼고 마음대로 놀았고, 백성들은 더욱 많은 세금을 내었다.
- 결국 이처럼 불교의 망함과 한국의 운명은 결국 장백산 남쪽으로 국한되어, 압록 두만 두 강의 목메는 물결소리만이 한 얼이 다시
살아나기를 애원하는 고구려의 끼친 영의 울음소리같이 북쪽하늘에 울리고 있게 되었다.
- 이조시대는 왜 그리 당파싸움이 많은가? 왜 그리 외국이 쳐들어옴이 많은가? 학문과 종교의 폐해가 왜 많은가?
- 이성계는 국민 이상도 없고, 민족정신도 없어 그 중축이 부러진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하니 어찌 나라가 바로 될 수 있을까?
-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 등장하는 동명왕, 혁거세, 온조.왕건 까지도 모두 관인대도(마음이 관대하고 인자하여 도량이 큼)하였다는
말이있는데, 이 태조에게 만은 그러한 말을 찾아볼 수가 없다.
말이있는데, 이 태조에게 만은 그러한 말을 찾아볼 수가 없다.
- 최영이 인물이었던 까닭도 있었으나, 민중이 태조의 반란에 그리 찬성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 이성계의 조선은 덕으로 된 나라도 아니오, 정의감에 호소한 혁명에 의한것도 아니다. 폭력으로 된 것이요. 꾀와 수단으로 된 것이다.
- 이렇게 꾀와 수단으로 임금이 되었다는 것은 그 조정에 충의의 샘이 말라 붙었다는 증거이다.
- 나라 초반부터 성서롭지 못한일이 궁중에서 일어나는데, 태조의 여러아들이 서로 임금자리를 다투려, 서울 장안에서 서로의 군사를
이끌고 서로 목을 겨누었다고 한다. 이때 태조가 너무 슬퍼 함흥으로 내려가서 오지 않았다고 해서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끌고 서로 목을 겨누었다고 한다. 이때 태조가 너무 슬퍼 함흥으로 내려가서 오지 않았다고 해서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
- 세종대왕은 본래 타고나기를 잘했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32년간 정치를 올바로 하고, 새로 창작을 많이하여, 이조 일대중에 제일가는
어진 임금이라함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돌아간 뒤, 역사 고갱이에 든 병을 고치지 못하였으니, 그가 쌓아둔 공로는 거의
다 무너지고 말았다.
어진 임금이라함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돌아간 뒤, 역사 고갱이에 든 병을 고치지 못하였으니, 그가 쌓아둔 공로는 거의
다 무너지고 말았다.
- 세종의 중심에는 집현전이 있었다. 재지 있는 선비들을 모아 나라일을 의논하게 할 사람을 키우는 것이었으니, 그 학문은 유교경전이며,
정치사상은 왕도주의 였다. 태조가 나라의 껍데기를 만든 사람이라면, 세종은 그 혼을 불어넣을려고 한 사람이었다.
- 하지만 세종이 조금더 임금을 했었더라면 정말 스러지는 나라의 기세를 세울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로 한글을 보면 그러하다.
- 한글은 단군시대나 고려시대에도 흔적은 있으나, 밀려드러온 중국문화에 그만 묻혀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백성들이 어려워
하자 세종이 만들어 내었다.
하자 세종이 만들어 내었다.
- 혹자는 세종이 만들어 낸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지만, 혹이나 만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통하게 쓰이게 된것은 모두 세종의
마음씀씀이 때문이리라.
마음씀씀이 때문이리라.
- 우리가 아름다운 한글을 두고 한자를 쓰는 이러한 현상은 과거 부터 쌓여온 중국 문화에 눌려있음이요. 또하나는 그시대 문화를 지니고
있는 일부사람이 적은 수의 권력계급에 한정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권력자는 중국 문화의 도매상을 함으로서 유리한 지위를 얻었고,
또 그 기득권을 유지할려면 공유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었으니...
있는 일부사람이 적은 수의 권력계급에 한정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권력자는 중국 문화의 도매상을 함으로서 유리한 지위를 얻었고,
또 그 기득권을 유지할려면 공유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방법이었으니...
- 당연히 접근성이 어려운것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좋았으니, 당연히 중국한자를 좋아했을 수 밖에... 이렇게 계몽을 막는것은 시대를
훑어 보아도 기본 룰인듯 하다.
훑어 보아도 기본 룰인듯 하다.
- 세종이 한글을 만들어 배포할때 가장큰 반대 세력은 바로 집현전의 학사들이었다. 이런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낸것을 보면 세종은
이조가 낸 임금이 아닌 하늘이 내린 임금이다.
이조가 낸 임금이 아닌 하늘이 내린 임금이다.
- 한글은 우리 민족의 눈을 뜨게 해준것이니, 눈을 뜬지 500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 세종의 빛나는 업적은 더욱 많다. 역사를 엮은것, 책을 낸 것, 산업을 장려한 것, 음악을 정돈 한것, 천문 연구를 시킨것,,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수 없이 많았다.
- 그중 외정에 관해서는 자세히 말해보아야 겠다. 그것은 국민 의기의 높낮이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 고려 말부터 왜구의 침입이 있었고, 임금 첫해에 이를 뿌리 뽑기 위해 대마도를 쳤다. 또한 북으로는 여진을 토벌하고 압록강에 고을을
두어 이민을 충실히 지켜 북쪽 국경이 확정되었다.
두어 이민을 충실히 지켜 북쪽 국경이 확정되었다.
- 세종이후에 문종이 서는데, 문종은 외모부터 바르게 생겨 세종의 뜻을 잘 이어나갈것으로 기대되었으나, 2년만에 돌아가게 되니, 그때
새롭게 임금이 된 단종은 불과 12살이었다.
새롭게 임금이 된 단종은 불과 12살이었다.
- 문종이 죽을때, 자신의 동생이었던 수양은 멀리한체 자신의 신하에게 단종을 부탁한다고 하였으니, 여기서 부터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 수양대군은 문무가 이성계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결국 한명회와 같은 어두운 세력들과 손을 잡고 어린 왕을 내 쫒아 왕위를 빼았으니
이가 바로 세조이다.
- 세종 문종때에는 불행의 징조가 없었으나, 문종의 단명이 역사의 흐름을 다르게 만들었다.
- 문종 또한 8대군이 병풍처럼 둘러싸 만약 문종이 오래 살았다면, 수양은 형을 돕는 큰 한 팔이 되었을 것이다.
- 세종을 보고 위대하다 생각하고, 문종을 보고 안타깝다 생각하고, 단종을 보고 불쌍하다 생각하고, 세조를 보고 침을 뱉고 싶겠지만, 이
또한 개인만의 잘못은 아니니라, 세종이 집현전을 세워 많은 것을 이루어 내었지만, 그보다 바로 잡아야 하는 역사를 뿌리채 새로 보았
어야 함이지만 이것을 그 시대를 살며 알아가는것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또한 개인만의 잘못은 아니니라, 세종이 집현전을 세워 많은 것을 이루어 내었지만, 그보다 바로 잡아야 하는 역사를 뿌리채 새로 보았
어야 함이지만 이것을 그 시대를 살며 알아가는것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종에게 사랑을 받고, 문종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집현전의 3친구이자 학자였던, 정인지.신숙주.최항이 있었는데,
세조로 하여금 귀향을 보낸 단종을 죽이라고 말한이가 정인지 신숙주요, 김종서를 죽이고 앞장서 들어올때 환영한 이가 최항이니, 이것이
집현전이었다.
집현전이었다.
- 결국 세종의 유교 도덕의 장려가 이러한 문제를 야기 시킨것이었다. 유교에서 말하는 정치론은 강력한 군주에 의한 정치운영론이 아니고
유학의 소양을 갖춘 사대부가 정치운영의 중심이 되는 정치론이었다
- 세조가 피 묻은 손으로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선악이 모두 거꾸로 바뀌어 흉하고 사납고 발라 맞추고 앙큼한 놈들은 모두 정난공신이 되고,
맑고 밝고 바르고 참된 뼈다귀 있는 선비들은 모두 역적이 되어 조정은 백귀야행의 터가 되고 말았다.
- 하지만 이러한 의인 중에 행동을 한 이가 있었다. 조정에 육탄(자신의 몸을 던져서)을 던진 사건이 바로 단종 모복사건이다.
- 단종 모복 사건 : 단종의 복위 운동. 집현전 학자가 주축이됨.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이었으나, 사전발각되어 모두 처형당함.
-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수양도 정의를 향하여 정면으로 대들수는 없으니, 어린 단종을 앞에두고 왕위를 계승 받는 형식을 취하기로 하고,
엎드려 왕위를 받으려고 하였다.
- 만일 이때 몇사람이 죽을 각오를 하고 삼문의 편을 들어 반대를 표하였다면, 그리하여 수선식이 깨졌다면, 그리하여 백성이 알았다면,
수양도 어쩔수 없었을 것이나 그럴 수 없었고, 후일을 기약하게 되었다.
수양도 어쩔수 없었을 것이나 그럴 수 없었고, 후일을 기약하게 되었다.
- 항의는 처음으로 하지 못하면, 두 번째는 더 힘들어지고, 결국은 혁명만이 답이되고, 그 혁명을 하지 못하면 영원한 종살이다.
- 이때 성삼문이 그날 죽으려고 뛰어드는 박팽년을 말려서 후일을 도모하고, 명나라 사신의 방문기회를 틈타,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이개, 김질등의 동료와 날을 준비하였다.
이개, 김질등의 동료와 날을 준비하였다.
- 하지만 자그마한 일이 일어났고, 계획과 약간 달라지자, 모두들 주저하게 되었는데, 이때 유응부만은 군인이어서 그대로 시행하자고
하였으나, 나머지가 반대하니, 이에 불안함을 느낀 김질이 세조에게가 변심을 하고, 6명 모두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죽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육신(여섯신하)이다.
하였으나, 나머지가 반대하니, 이에 불안함을 느낀 김질이 세조에게가 변심을 하고, 6명 모두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죽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육신(여섯신하)이다.
- 사육신은 이 시대의 역사가 그나마 스스로의 죽음을 불살라서 치욕적인 5백년 역사를 되 갚을 수 있을 만큼의 큰 일이요. 아직도 의인의
씨가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씨가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사육신이 성공했다고 가정해보자, 한손에는 세조의 목을 들고, 단종을 복위시켜본들 역시나 정난공신이 되며, 한세대는 평온하였겠으나,
이처럼 의미있는 죽음은 되지 못하였으니, 오히려 사육신은 못죽을까 두려워 하지는 않았을까?
이처럼 의미있는 죽음은 되지 못하였으니, 오히려 사육신은 못죽을까 두려워 하지는 않았을까?
- 이러한 사육신이 있은 후 정인지 신숙주는 단중을 폐하고 귀향보내야 한다고 하니, 단종은 노산군으로 귀향을 간다.
- 이때 단종을 서강 청령포(현재의 강원도 영월)배웅한 왕방연은 그 사실이 너무 슬퍼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 어린 것이 얼마나
외롭고 슬펐을까?
- 하지만 정인지는 단종을 끝까지 죽여야 한다고 하였으니, 설마 단종이 무서웠을까, 그 뒤에 백성이 무서웠을것이다. 그리하여 단종은
대낮에 개 잡듯 목을 홀치어 죽였다. 그의 나이 17살이었다. (영월에는 단종을 추모하는 축제가 아직도 있다.)
대낮에 개 잡듯 목을 홀치어 죽였다. 그의 나이 17살이었다. (영월에는 단종을 추모하는 축제가 아직도 있다.)
- 결국 상황이 이러하니, 사육신의 피만으로 되지 않고 더욱 더 많은 피를 원하게 되니, 그와 관련있다고 금성대군과 수십을 죽이게 되는데,
금성대군은 세조의 친 동생이다. 이러고도 세조는 명군이 되려고 버둥거렸다.
금성대군은 세조의 친 동생이다. 이러고도 세조는 명군이 되려고 버둥거렸다.
- 세조가 단종을 폐한 후 남은해를 이른바 명군으로 지내게 되었다. 이는 예종을 거쳐 성종까지, 성종시대는 태평성대의 시대로도 불린다.
- 하지만 이렇듯 일반적으로 그 시대를 파악할 수는 없는법. 실제 그 사회의 뒷면을 보아야만 제대로 알 수 있는것이다.
- 김시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사육신과 반대로 생육신이라 불리는데, 뜻은 같이 하였으나 단지 죽음을 면한 이들을 일컫는다.
- 그는 단종을 폐하고 세조가 섰다는 이야기를 듣고 산중에서 공부하다 말고 모든 책을 불질러 버리고, 머리깎고 중이 되어버린다.
- 김시습은 세종이 부를 정도로 천재가 있었고, 시와 문에 능하였다. 하지만 이런 그가 훗날 세조와 신숙주등에 초대를 받고 궁에 갈일이
있었으나 기행을 일삼아 소매를 뿌리치며 나왔다고 한다. 과연그가 미쳐서 그런것일까? 아니면 그가 할 수 있는 반대의 표시였을까.
- 하지만 성종이 돌아간 후 그 썩어있던 무서운 병이 세상밖으로 나오게 된다.
- 성종후의 연산은 채청사, 채홍사 ( 아름다운 여자를 구하기 위해 전국에 파견된 관리)를 둔것이나, 죄없이 죽어간 수많은 백성
이런것은 세조부터 성종까지 겉으로만 이루어내었던 명군의 어두운 실체가 아니었을까?
- 이런식으로 연산의 악행을 세조의 잘못에서 그 연유를 찾는다고 하면, 학자들은 곡해요 억단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를 하나하나 끊어서 봐서 그런것 아닌가? 어찌 역사가 하나하나가 만들어져 묶어진 것인가?
어떠한 흐름을 가지고 흘러가는 것임을...
- 성종에 와서 태평성대라는 식으로 되었지만, 궁중에는 술냄새, 기생의 난무가 떠날 날이 없었고, 이를 연산이 보고 자란것은
어찌하란 말인가?
- 또한 이때 선비사이에 배척하는 풍조가 있었고, 형식적인 유교는 계속해서 부족하고 그에 반하는 무리들을 만들어 내고 있었으니
이러한 것을 모두 모아놓은 것이 연산이 아닐까?
- 연산의 미친춤이 지나간 후 명종을 지나 선조까지 평안을 보여주었다. 이황과 이이가 나와 성리학이 발달하였다.
- 하지만 당쟁이란것은 어쩔 수 없는것처럼 생겨나게 되었다. 외국사람들이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쟁이라는 개념이다.
- 당쟁의 표면적인 이유는 성종때 일어난 김종직 일파의 산림파와 반 산림파간의 대립에 있다. 김종직은 청직하여 , 서거정이
그를 시기하여 후일 사화의 원인이 거기서 시작했다는 말도 있을 정도다.
- 확신할 순 없지만, 이러한 목적이 없는 반하는 상태가 당파싸움을 만들어 낸 원인이 되겠다.
- 남이의 옥사 : 남이장군은 이시애의 난 진압을 공로로 지위가 급격히 상승한 남이가 원로 훈신세력과 대립하다가, 세조때
훈신 세력의 모함을 받아 남이를 신진세력이 제거한 사건을 말한다.
- 남이 장군의 시는 아이들에게 까지 잘 알려져 있는데, 다음과 같다.
: 백두산의 돌칼 갈아 닳고 / 두만강의 물 마셔 없어 지리
사내 스무살에 나라 평정치 못하면 /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
- 남이 장군을 죽게한 것이 유자광이란 소인배인데, 유자광은 남이장군의 평정치 라는 말을 득하지(얻지) 로 바꾸어
역모를 꾀한다고 되어, 결국 죽게 된다. 정말 이 시대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 이렇듯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죽음에 까지 이르게 하는 이러한 성질은 세조때 부터 만연하여, 나라 자체의 도덕적해이가
그만큼 심각한 상태로 평준화 되어버렸던 것은 아닐까?
- 이러한 세조가 실질적인 당정의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삼국시대까지 살펴볼 수 있다.
- 당쟁의 원인을 유교라고 보는 이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없다. 단 유교로 인해 심각해진 것은 사실이다.
- 이러한 당쟁의 근본원인을 한마디로 하자면 민족적으로 자기를 잃어버린 것이 되겠다.
- 자신이 누구인지 잊었기 때문에 이상이 없고 자유가 없다. 또한 대동단결도 안된다.
- 민족을 묶는 것은 폭력이나 법이 아니고, 민족적 이상이다. 뜻이 하나일때 저절로 통일이 된다. 당파싸움의 목적은
작은 세력을 다투는데 있으니, 이는 자유가 없는 노예의 근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망국민일 수록 싸움이 많다.
- 이러한 민족적 정신혼란 시대에 가장 식견이 높았던 율곡 이이선생이 이러한 혼란상태의 끝은 예견한 탓인지, 혼란상태를
막기 위해 애를 썼다.
- 남의 오해도 받고 간혹 당쟁의 싸움에 역인다는 설도 있었으나, 역사상 환히 남은것으로 보아 대체로 맑은 마음을 가졌던
인물임은 분명하다.
- 선조때 직제학에 있으며 임금께 많이 기대하였으나, 임금이 그에 못미친다고 판단하여, 사직을 상소하게 되었다.
이때 만류하는 한 이가 물러가기를 구한다면 누가 나라를 위하는 사람이 있겠소? 라고 물으니 답하기를
만약 삼공부터 아래론 참봉에 이르기까지 모두 물러가기를 구하는 사람이라면 나라의 형세는 스스로 올라갈것이오.
캬~~~~^^
- 하지만 율곡은 의와 사랑을 말하는 이스라엘적 예언자가 아니고 달즉겸 선 천하 / 궁즉독 선 기신
즉 (영달할 때에는 사람이 다 선으로 돌아오고, 곤궁할 때에는 혼자 자기의 심신을 닦아 선하게 한다)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 유교식 군자였다.
- 이러한 율곡의 방향은 당쟁을 해결하고자 하는데 모아져 있었으나, 그 시대 세력들은 그에 동조하지도 않았고, 설득되지도
않았음은 물론이다.
- 율곡은 이준경에 대한 유차로 다른모습의 그를 볼 수가 있다. 이준경의 유차란, 선조시대에 영상으로 있던 이준경이 죽을때
유언이 되었던 4조를 말한다. 그 네가지가, 학습, 제왕의 위의, 군자/소인을 갈라서 써라, 붕당을 막아달라. 라는 것이었다.
- 하지만 율곡은 이준경의 유차에 대해 상소를 하여 잘못된 말이라고 하니, 불과 이준경이 죽고 3년뒤에 붕당이 되어버리는판에
과연 그가 시대를 못보진 않았을 것이고, 위인을 간악하게 본 것도 아닐것이고 하니 결국은 고의라는 수 밖에는 없다.
- 만일 그렇다면 두가지 이유가 있었을터인데, 그 한가지는 당파심에서 음해하는 수단이었을 것이고, 다르다면 준경의 어짊과
나라 공로를 모름이 아니니, 이러한 것으로 장차 조정에 화단이 일까 그것을 미리 눌러 없엠을 위해 극력 배척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2번째 경우 일 수밖에 없다.
- 하지만 이러한 율곡의 행동은 붕당의 뿌리를 한 낱 몇몇 인간의 감정충돌에서 보았음에 대한 행동이니,
이러한 것 보다는 차라리 드러내서 썩은 부분을 잘라내는 것이 훨 좋았을 것이다.
- 이러한 율곡의 성과는 곧 이루어지기 직전이었으나 갑자기 이때 퇴장하라는 명령을 받고 일은 그때문에 틀어진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음) 그리고 49의 짧은 생을 마감하니 임금부터 백성까지 울음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 선조 25년 임진년 4월 13일 부산진 앞바다에 일륜의 뒤를 이어 한 점의 검은 구름이 움직이고 있었다.
- 30만 자루의 일본도와 서양문명의 철포를 앞세워 아침 10시 부산진에 4백척의 병선이 바다를 뒤 덮었다.
- 바로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 : 오다 노부나가의 부장으로 무공을 세웠고, 그가 죽은뒤 전국을 통일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 이게 중요하다 결국 실패했다.
- 역시 큰 사건에는 전조라는 것이 있으니, 신숙주가 죽기전 절대 일본과는 사이가 나빠져서는 안된다고 하였고, 율곡도
선조를 보고 십년이 못되어 큰 변이 있을터이니 군사 십만만 길러서 준비하고 자 하였다.
- 율곡이 양병론을 주장할때 당연히 그저 현재가 좋은 조정은 그 말을 무시함은 어찌보면 당연함이었으니,,,
- 또한 수길의 교섭이 시끄러워 움직임을 살피러 김성일, 황윤길 두 사람을 보내었으나 둘이 보고함이 다르니,
황은 그 눈이 번쩍번쩍 하여 과연 재주와 용맹이 있다 하였고, 김성일은 그 눈이 쥐눈 같아 족히 두려울게 없더라 하였다.
- 동인과 서인이었으니 보고가 다르면 당연한 것인가? 그저 이들은 미래의 두려움보다는 현재의 누리는 안락과 권세가
더 중요하였으니 과연 이 꼴이 망국민이었다.
- 조헌이 이런 우유부단한 외교를 보고 국책을 세워야 한다 하였으나, 보고는 위로 오르지 못하였고, 목숨걸고 직접 조정에
가서 고하니 귀향으로 답하였다.
- 난이 나기 직전해에도 다시한번 안타까움을 참지 못하고 방책을 취하기를 말한즉, 무시하고 사흘을 본체만체 하였다.
결국 명년에 산골로 도망을 할때는 내말을 생각할거다 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 왜군은 가는곳 마다 대적이 없었다.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노랍시고 어리석은 민족을 농락하였다.
- 부산에 올라온지 반달이 못되어 서울이 떨어지고 평양이북의 한 귀퉁이를 빼고는 조선 8도 왜구의 발굽에 성한대가 없었다.
임금은 의주로 피난하고, 대국을 향하여 목숨을 건져달라하였다.
- 환난중에 한 줄기 살길을 예비한 것이 바로 충무공의 바닷길이었다. 8년동안 사나운 위력을 보이던 그 군대가 아무 소득없이
명예스럽지 못한 퇴군을 한것도 오로지 이 바닷길 하나를 얻지 못하기 때문인데, 이 생명선을 지킨이가 바로 우리 충무공이다.
- 왜구들도 이순신을 보고 조선에 저런 영웅이 있었냐고 되 물었고, 세계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이 그 전공의 태반이다.
그리고 그의 인격또한 높음을 왜구는 흠모하였다.
- 8년간의 전쟁중에 길거리는 시체로 뒤 덮혔으며, 먹을 것이 없어 사람이 죽으면 살을 뜯어먹기 바빴고, 모든 권력과 재물은
먹을것으로 구매가 가능한 시기였다.
- 역시 이때 일어난 것은 민중이었다. 대신들이 어찌 할 바를 모를때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
삼부자가 모두 전사한 고경명, 진주성을 지킨 김천일, 조헌,, 그 외 수많은 영웅들이었다.
- 민중과 달리 지배자와 지도계급은 문화 문화재 예술품을 모두 잃어버렸음에도, 잃어버리지 않은것이 있으니, 바로 책임을 서로
에게 미루는 당파싸움만은 잃지 않았다.
- 결국 의주의 귀퉁이에서도 하나된 나라를 위해서가 아닌 오로지 자기 세력을 위한 싸움으로 동인이 갈라져 남인 북인이 되고,
서인은 갈라져 노.소가 되고, 북인은 또 대.소 가 되어 서로 엉켜서 싸움만 하였다.
- 임진왜란(임진년의 왜가 쳐 들어옴)이 있은후, 겨우 40여년 만에 이번에는 병자호란(병자년에 호란(청)이 쳐 들어옴)이 일어난다.
청나라는 우리나라가 부락을 기반으로 다스려 오던나리인데...누르하치가 이를 정리하고 임진란에 청이 도와주겠다고 하자
동생에게 어찌 도움을 하며 보기 좋게 거절하니, 도대체가 이러한 어의 없음은 지금과도 비슷한가?
- 아랫나라라고 생각하던 청이 커가고, 모시던 명이 약해져 가니 잘못된 판단은 뜨거운 복수로 돌아오게 되었다.
- 누르하치가 죽고 나서 청 태종이 서게 되고, 명과 조선이 힘을 합쳐 자신을 칠거라는 구실을 앞세워 우리에게 쳐들어 온다.
싸움같은 싸움 못해보고 청에게 무너지는 도중 임경업이 군사를 달라라고 하지만 역시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은 실망시키지
않는다. 나라보다 자신의 세력걱정으로 내어주지 않게 되고 조선과 청은 이제 형/아우가 뒤바뀐 형국이 되고, 계속된 청의
조공요청에 반항하던 조선은 병자호란이라는 뜨거운 불길을 맞이하게 된다.
- 결국 청의 식민지가 되어버리고, 왕족일가는 볼모로 청으로 끌려가고, 삼학사는 이때 죽게 된다.
- 임진란의 충무공 이순신이 있었다면, 병자호란에는 충민공 임경업이 있었다. 투쟁심이 강했으며 지략적으로도 우수했다.
- 청태종이 무서워 하였지만, 조선의 지원 미비로 전쟁에서 지게되고, 여차여차 포로가 되었지만 굽히지 않는 기개로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지만 들리는 말은 모함과 악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 이때 드디어 한국역사의 최초로 북벌이 계획된다. 바로 병자란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효종이 그 주인공이었다.
-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결국 북벌론으로 마무리가 되고 만다. 역시 이 것이 가능하게 한것은 바로 사라지지 않는 당파싸움이었다.
- 탕평채 라는 음식은 영조가 당론을 하나로 합쳐보자는 의의에서 음식상에 내놓은 음식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 이러한 음식이름의 유래처럼 영조 52년 집권, 정조 20년 집권 약 80년간의 집권 시기에 탕평이 상당히 많은 진척을 이루게 되었다.
- 우리나라의 학문은 삼국시대 이전에는 고유의 학문이 있었으나, 고려로 접어들면서 부터 중국의 문화를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게
되었다. 이유는 바로 당의 힘을 빌어서 통일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임진.병자년에 겪은 두번의 아픔으로 인해 학문적 자립성을 찾아보자는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 이때 새로 생겨난것이 실학이며, 숙종, 영조 때에 더욱 풍하고 늘어나게 된다. 수많은 작가와 저술한 책이 나오게 된다.
이러한 실학의 영향범위는 정치, 민중 등 모든 분야에 전파되고 있었다.
- 이때 들어온것이 기독교이다. 유교와 불교 모두 민생의 종교라기 보단 집권층의 종교이며 정치색으로 사용된 경향이 강했다.
물론 유교.불교 모두 건국을 한 기본종교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다는 말이다.
이에 새로운 종교가 필요했던 것이다.
- 기독교에 대해 잠깐 살펴보자면, 카톨릭의 교황앞에서 모든 세계가 돌아가던 즈음, 십자군 원정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만인의 구원
을 기치로 하는 기독교가 생겨나며,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각각 서쪽과 동쪽을 맡아 토인착취와 식민지 확장이라는 명 아래 기독교가
확장되게 된다. 전도의 목적이 있었던 없었던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고, 이를 유심히 관찰하던 로마 카톨릭은 세계 각지 특히
손이 닿지 않았던, 인도 중국 일본 등지로 보내게 된다.
- 임진란때 부터 초기의 전도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영향도 주지 못했다. 하멜은 효종때 제주도에 표착하여 제주도사람
들이 구경거리로 10여년 붙잡고 학대를 하였지만, 종교적 영향은 없었다. 중국 일본 등지는 혹시나 상품에 섞여서라도 종교가
왔지만 한국만은 없었다? 스스로 자진하여 구하기를 기다리는 형국이었다.
- 숙종 영조 정조에 이르면서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차츰 퍼지기 시작하였다. 종교라기 보단 학문으로 인정을 받았고 천주학, 서학등
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 유교와 불교의 태생이 정치권에서 백성에게로 내려온 종교라면, 기독교는 아래서 부터 퍼지기 시작하였다. 바로 실학과 맞물려서
돌아가면서 부터였다.
- 이러한 대표주자들이 바로 박학을 자랑하던 남인들이었다.27의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들어오면서, 정약용등도 믿게 되었고
신앙단체가 성립되었고, 이것이 한국 기독교의 첫돌이었다.
- 중국과 일본에서는 천주교가 환영받지 못하면서 시작되었지만, 한국에서는 남인에게 환영받으며 시작된 특이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는 한국이 잘 해서라기 보다는 그 시대의 지푸라기라도 잡을려는 것과 맞물려서 였으리라.
- 남인 중심의 핵심이 생기자 걷 잡을수 없이 퍼져 나갔다. 드디어 사회에 파문을 일으키는 수준이 되었고, 학문적 지위에서 종교적
지위로 위상이 변모하자, 정치계에서 움직이게 되었다.
- 정조 10년 천주교 금지령이 내려지게 된다. 이때 부터 순교의 행렬이 생겨난다. 당연히 유교의 메인테마인 제사와의 갈등이었다.
- 이렇게 되자 천주교는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북경에 전하게 되고 가급적 비슷한 사람이 좋겠다 하여, 중국 소주 출신의 주문모를
보내었지만 7년간의 전도후 순교하게 된다.
- 정조의 탕평책으로 그나마 유지되던 천주교는 정조가 세상을 등지면서 부터 서인이 세력을 얻어감에 따라 큰 핍박이 일었다.
- 순조 원년 1801년 신유의 일이다.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 등이 순교하고, 대표적 학자 정약용이 유배되며,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이때 순교하게 된다.
- 계속해서 여러 경로를 통해 외국인 신부가 들어오고 순교하는것이 반복되었다. 김대건 신부도 이때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철종때 정치가 풀어짐에 따라 그 세는 확대되어 몇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 하지만 고종 3년 대원군이 큰 학살을 하게 된다. 9명의 신부와 몇 천의 신도가 죽었다. 이 사유는 러시아로 부터 통상개시를
요청 받았을때 조선정부는 천주교를 통해 프랑스의 힘을 빌리려 하다가 실패하자 대가로 천주교를 탄압하게 된 것이다.
이 일로 병인양요가 발생하게 된다.
- 대원군이 쫓겨나고, 나라가 열리자 핍박이 차츰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 1832년에 첫 선을 보인 개신교는 1882년에 제대로 전해지게 되었다. 열국시대가 열리기전 유교가 들어왔고, 삼국시대가 열리기
전 불교가 들어 왔다. 하지만 천주교/개신교는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
- 기본적인 기독교는 만민 평등이 기본사상이었지만, 천주교는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 한국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으니, 교회에서
도 양반은 양반 상놈은 상놈이었다. 또한 사대주의도 전혀 개선되지 못한 상태였다.
- 결국 천주교는 미신, 사대주의 , 만민평등의 기독교의 기본요소의 확보를 위해 투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시대를 개혁하는 종교로
는 실패한 종교 였다. 특히 이 모든것을 뒷바침 하는 교육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 영.정조의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당파싸움은 여전했으며, 벼슬아치의 학정은 더욱 심해져 가고 있었다.
- 이때 지방차별의 폐습으로 과거에 낙방한 홍경래가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 이렇게 무언가 필요한 때에 천주교가 하지 못한것을 하러 나타난것이 개신교였다. 그의 시대적 동반자는 동학이었다. 개신교는
뿌리는 천주교 이지만 더욱더 평등을 강조하고 자유정신을 강조한다. 이러한 기원은 미국의 프로테스탄트였다.
- 천주교가 실학을 파트너로 정치권에서 시작되었다면, 개신교는 철저히 민중에서 시작되었다. 배화학당, 이화학당, 경신학당, 대성,
오산학교등 수많은 학교, 병원 등이 이러한 기독교의 영향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 이러한 평민사상을 기본으로 하기 위해서 무언가 필요했는데 이것이 바로 동학이다. 민족죵교운동이었으며 어린이와 여성을
평등히 대하자는 교리가 담겨 있었다. 물론 천주교를 반대하며 나온 움직임이었다.
- 옆나라 일본에서는 명치유신(메이지 유신)을 통해 도쿠가와 막부를 붕괴시키고, 근대식의 나라를 세우고 임금을 천황이라고
하고 우리에게도 나라를 열라고 이야기 한다. 물론 미국의 페리제독의 강권에 못이겨서 였긴 하지만 말이다.
- 앞서 이야기한 기독교나 천주교가 왜 제대로 민중의 개혁을 성공시키지 못했을까? 바로 중산층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 사회가
제대로 발달하는 나라는 항상 풍부한 중산계급이 존재한다.
- 당파싸움을 하였고, 외척에게 시달리다, 결국은 궁중의 싸움으로 우리나라의 꼴은 정리가 되었다.
대원군과 민비같은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 함석헌 선생은 매우 높게 평가 받고 있는 학자이다. 개신교 신자였으며, 한국을 위해 노력했던 학자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은 그동안 읽었던 어떠한 역사관련 책보다 우수하며, 인과관계를 짧고 핵심적 요소를 짚어가며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에는 앞으로의 우리내 미래가 많이 담겨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 안타깝지만 거기에 맞추어 가며 살아가야 하는것이
우리내 인생의 끝이 아닐까? 그렇다 내말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말이다. 인간으로서는 우리는 다르게 살 수 있다.
이걸 빨리 깨달아야 한다.
[9.5]
- 임진왜란(임진년의 왜가 쳐 들어옴)이 있은후, 겨우 40여년 만에 이번에는 병자호란(병자년에 호란(청)이 쳐 들어옴)이 일어난다.
청나라는 우리나라가 부락을 기반으로 다스려 오던나리인데...누르하치가 이를 정리하고 임진란에 청이 도와주겠다고 하자
동생에게 어찌 도움을 하며 보기 좋게 거절하니, 도대체가 이러한 어의 없음은 지금과도 비슷한가?
- 아랫나라라고 생각하던 청이 커가고, 모시던 명이 약해져 가니 잘못된 판단은 뜨거운 복수로 돌아오게 되었다.
- 누르하치가 죽고 나서 청 태종이 서게 되고, 명과 조선이 힘을 합쳐 자신을 칠거라는 구실을 앞세워 우리에게 쳐들어 온다.
싸움같은 싸움 못해보고 청에게 무너지는 도중 임경업이 군사를 달라라고 하지만 역시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은 실망시키지
않는다. 나라보다 자신의 세력걱정으로 내어주지 않게 되고 조선과 청은 이제 형/아우가 뒤바뀐 형국이 되고, 계속된 청의
조공요청에 반항하던 조선은 병자호란이라는 뜨거운 불길을 맞이하게 된다.
- 결국 청의 식민지가 되어버리고, 왕족일가는 볼모로 청으로 끌려가고, 삼학사는 이때 죽게 된다.
- 임진란의 충무공 이순신이 있었다면, 병자호란에는 충민공 임경업이 있었다. 투쟁심이 강했으며 지략적으로도 우수했다.
- 청태종이 무서워 하였지만, 조선의 지원 미비로 전쟁에서 지게되고, 여차여차 포로가 되었지만 굽히지 않는 기개로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지만 들리는 말은 모함과 악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 이때 드디어 한국역사의 최초로 북벌이 계획된다. 바로 병자란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효종이 그 주인공이었다.
-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결국 북벌론으로 마무리가 되고 만다. 역시 이 것이 가능하게 한것은 바로 사라지지 않는 당파싸움이었다.
- 탕평채 라는 음식은 영조가 당론을 하나로 합쳐보자는 의의에서 음식상에 내놓은 음식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 이러한 음식이름의 유래처럼 영조 52년 집권, 정조 20년 집권 약 80년간의 집권 시기에 탕평이 상당히 많은 진척을 이루게 되었다.
- 우리나라의 학문은 삼국시대 이전에는 고유의 학문이 있었으나, 고려로 접어들면서 부터 중국의 문화를 답습하는 수준에 머물게
되었다. 이유는 바로 당의 힘을 빌어서 통일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임진.병자년에 겪은 두번의 아픔으로 인해 학문적 자립성을 찾아보자는 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 이때 새로 생겨난것이 실학이며, 숙종, 영조 때에 더욱 풍하고 늘어나게 된다. 수많은 작가와 저술한 책이 나오게 된다.
이러한 실학의 영향범위는 정치, 민중 등 모든 분야에 전파되고 있었다.
- 이때 들어온것이 기독교이다. 유교와 불교 모두 민생의 종교라기 보단 집권층의 종교이며 정치색으로 사용된 경향이 강했다.
물론 유교.불교 모두 건국을 한 기본종교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다는 말이다.
이에 새로운 종교가 필요했던 것이다.
- 기독교에 대해 잠깐 살펴보자면, 카톨릭의 교황앞에서 모든 세계가 돌아가던 즈음, 십자군 원정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만인의 구원
을 기치로 하는 기독교가 생겨나며,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각각 서쪽과 동쪽을 맡아 토인착취와 식민지 확장이라는 명 아래 기독교가
확장되게 된다. 전도의 목적이 있었던 없었던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고, 이를 유심히 관찰하던 로마 카톨릭은 세계 각지 특히
손이 닿지 않았던, 인도 중국 일본 등지로 보내게 된다.
- 임진란때 부터 초기의 전도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영향도 주지 못했다. 하멜은 효종때 제주도에 표착하여 제주도사람
들이 구경거리로 10여년 붙잡고 학대를 하였지만, 종교적 영향은 없었다. 중국 일본 등지는 혹시나 상품에 섞여서라도 종교가
왔지만 한국만은 없었다? 스스로 자진하여 구하기를 기다리는 형국이었다.
- 숙종 영조 정조에 이르면서 천주교에 대한 인식이 차츰 퍼지기 시작하였다. 종교라기 보단 학문으로 인정을 받았고 천주학, 서학등
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 유교와 불교의 태생이 정치권에서 백성에게로 내려온 종교라면, 기독교는 아래서 부터 퍼지기 시작하였다. 바로 실학과 맞물려서
돌아가면서 부터였다.
- 이러한 대표주자들이 바로 박학을 자랑하던 남인들이었다.27의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들어오면서, 정약용등도 믿게 되었고
신앙단체가 성립되었고, 이것이 한국 기독교의 첫돌이었다.
- 중국과 일본에서는 천주교가 환영받지 못하면서 시작되었지만, 한국에서는 남인에게 환영받으며 시작된 특이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는 한국이 잘 해서라기 보다는 그 시대의 지푸라기라도 잡을려는 것과 맞물려서 였으리라.
- 남인 중심의 핵심이 생기자 걷 잡을수 없이 퍼져 나갔다. 드디어 사회에 파문을 일으키는 수준이 되었고, 학문적 지위에서 종교적
지위로 위상이 변모하자, 정치계에서 움직이게 되었다.
- 정조 10년 천주교 금지령이 내려지게 된다. 이때 부터 순교의 행렬이 생겨난다. 당연히 유교의 메인테마인 제사와의 갈등이었다.
- 이렇게 되자 천주교는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북경에 전하게 되고 가급적 비슷한 사람이 좋겠다 하여, 중국 소주 출신의 주문모를
보내었지만 7년간의 전도후 순교하게 된다.
- 정조의 탕평책으로 그나마 유지되던 천주교는 정조가 세상을 등지면서 부터 서인이 세력을 얻어감에 따라 큰 핍박이 일었다.
- 순조 원년 1801년 신유의 일이다. 이승훈 이가환 정약종 등이 순교하고, 대표적 학자 정약용이 유배되며,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이때 순교하게 된다.
- 계속해서 여러 경로를 통해 외국인 신부가 들어오고 순교하는것이 반복되었다. 김대건 신부도 이때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에서 활동하게 되었고, 철종때 정치가 풀어짐에 따라 그 세는 확대되어 몇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 하지만 고종 3년 대원군이 큰 학살을 하게 된다. 9명의 신부와 몇 천의 신도가 죽었다. 이 사유는 러시아로 부터 통상개시를
요청 받았을때 조선정부는 천주교를 통해 프랑스의 힘을 빌리려 하다가 실패하자 대가로 천주교를 탄압하게 된 것이다.
이 일로 병인양요가 발생하게 된다.
- 대원군이 쫓겨나고, 나라가 열리자 핍박이 차츰 없어지기 시작하였다.
- 1832년에 첫 선을 보인 개신교는 1882년에 제대로 전해지게 되었다. 열국시대가 열리기전 유교가 들어왔고, 삼국시대가 열리기
전 불교가 들어 왔다. 하지만 천주교/개신교는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였다.
- 기본적인 기독교는 만민 평등이 기본사상이었지만, 천주교는 한국에 정착하기 위해 한국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으니, 교회에서
도 양반은 양반 상놈은 상놈이었다. 또한 사대주의도 전혀 개선되지 못한 상태였다.
- 결국 천주교는 미신, 사대주의 , 만민평등의 기독교의 기본요소의 확보를 위해 투쟁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시대를 개혁하는 종교로
는 실패한 종교 였다. 특히 이 모든것을 뒷바침 하는 교육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 영.정조의 탕평책에도 불구하고 당파싸움은 여전했으며, 벼슬아치의 학정은 더욱 심해져 가고 있었다.
- 이때 지방차별의 폐습으로 과거에 낙방한 홍경래가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다.
- 이렇게 무언가 필요한 때에 천주교가 하지 못한것을 하러 나타난것이 개신교였다. 그의 시대적 동반자는 동학이었다. 개신교는
뿌리는 천주교 이지만 더욱더 평등을 강조하고 자유정신을 강조한다. 이러한 기원은 미국의 프로테스탄트였다.
- 천주교가 실학을 파트너로 정치권에서 시작되었다면, 개신교는 철저히 민중에서 시작되었다. 배화학당, 이화학당, 경신학당, 대성,
오산학교등 수많은 학교, 병원 등이 이러한 기독교의 영향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 이러한 평민사상을 기본으로 하기 위해서 무언가 필요했는데 이것이 바로 동학이다. 민족죵교운동이었으며 어린이와 여성을
평등히 대하자는 교리가 담겨 있었다. 물론 천주교를 반대하며 나온 움직임이었다.
- 옆나라 일본에서는 명치유신(메이지 유신)을 통해 도쿠가와 막부를 붕괴시키고, 근대식의 나라를 세우고 임금을 천황이라고
하고 우리에게도 나라를 열라고 이야기 한다. 물론 미국의 페리제독의 강권에 못이겨서 였긴 하지만 말이다.
- 앞서 이야기한 기독교나 천주교가 왜 제대로 민중의 개혁을 성공시키지 못했을까? 바로 중산층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 사회가
제대로 발달하는 나라는 항상 풍부한 중산계급이 존재한다.
- 당파싸움을 하였고, 외척에게 시달리다, 결국은 궁중의 싸움으로 우리나라의 꼴은 정리가 되었다.
대원군과 민비같은 사례가 바로 그것이다.
◈ 함석헌 선생은 매우 높게 평가 받고 있는 학자이다. 개신교 신자였으며, 한국을 위해 노력했던 학자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 책은 그동안 읽었던 어떠한 역사관련 책보다 우수하며, 인과관계를 짧고 핵심적 요소를 짚어가며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에는 앞으로의 우리내 미래가 많이 담겨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 안타깝지만 거기에 맞추어 가며 살아가야 하는것이
우리내 인생의 끝이 아닐까? 그렇다 내말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말이다. 인간으로서는 우리는 다르게 살 수 있다.
이걸 빨리 깨달아야 한다.
[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