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가 한말인데, 직접 카뮈가 서술한 글을 읽어본 적은 없으나, 윤석철 교수의 책에서 카뮈가 이야기한 부조리에 대한 정의를 빌리자면, 법적인 잘못은 없으나 피해자가 생기는 상황을 설명하는 말로 쉽게 정의할 수 있다.
간단히 이야기 하면 이런 예를 들 수 있겠다.
한 반의 아이가 50명인데, 다들 열심히 공부한다. 열심히 공부를 하지만 성적은 1~50등까지 나누어진다. 내신을 기준으로 대학을 간다면 결국 열심히 하는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잘 하는 사람이 대학에 진학한다.
뭐 시쳇말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이런 말이 부조리를 상당히 잘 표현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1등만 기억한다고 처벌이나 법적인 제제를 받지 않는 상황 이것을 부조리한 상황이라고 카뮈는 이야기 하고 있다.
회사라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비밀무기로 한 인간 집단들 속에 소속된지 어느덧 5년 6개월이 넘어가고 있다.
회사라는 곳은 철저히 부조리가 만연한 곳이다. 카뮈는 부조리와 싸우는것 자체가 인생이라고 했는데, 어찌그리 정확하게 지적한것인지...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는 소위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회사다. 다른 회사는 경험을 하지 않아 모르겠으나, 두번다시 어떠한 회사의 형태도 접하고 싶지는 않다.
회사에서는 철저히 부조리한 운영체계를 가지고 있다. 절대로 처벌은 없다. 자연도퇴될 뿐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 자연도퇴되는 대부분의 구성원은 열심히 일한다. 자신의 전성기 에너지를 다 뽑아내어 기득권의 양분으로 가공한다.
기득권들은 누구나 기득권이 될 수 있다라는 자유경쟁체제를 내세우며 부조리한 시스템의 정당성을 강조한다.
결국 부조리 시스템에서 법적인 처벌이 불가능한 자유경쟁 패배자는 생겨나게 마련이며, 이 숫자 또한 기득권의 숫자대비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이다.
그럼 바꾸어 생각해보자 내가 기득권이 된다면, 솔직히 모르겠다. 정당한 기득권이 될려고 할것이지만, 나역시 장담하지 못한다. 나 또한 기득권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이 0%라고는 할 수없으니, 하지만 5%가 안된다고는 장담한다....-_-; sorry~
오늘도 한바탕 이기주의를 바탕으로 수많은 이와 보이지 않는 전쟁을 펼치고 온 마음에 상처를 안고 귀향한다.
이 전쟁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끝날때 대부분의 병사는 패전병이 될 것이다. 부조리 시스템의 부산물이다 이것을 없엘 수 있는 화확적인 방법은 없다.
난 그렇게 예언한다. 예언이 아니지... 어쩔수 없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내가 미국 대통령이라도 이건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나의 현 상황은 대다수 한국인에게는 기득권에 가까운 위치에 있다고 판단 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기득권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 자신에게 충실한 자아야 말로 부조리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임을 알면서도 부조리에 몸담고 있는 내가 불쌍해 보일 뿐이다.
세상은 커다란 구와 같다. 3D Graphics의 컨셉에서 보면 구는 수많은 삼각형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작은 삼각형이 모여있을 수록 완벽히 구처럼 보인다. 무한대의 개념이 잘 탑재되어 있는 것이다. 무한에 가까워 질수록 정제된 구가 탄생한다.
지식과 경험과 나이가 늘어나면서 구는 점점더 정제된다. 즉 인생의 다양함을 알게되고 보게되고 느끼게 된다.
세점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삼각형은 내가 쳐다 볼 수 있는 하나의 반사체일 뿐이다.
난 우리의 삶이 커다란 인생이라는 구를 쳐다보는 것이며, 그 쳐다보는 화면이 시시각각 변한다고 생각한다.
처칠이 말했듯이 낙관주의 말고는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칸트나 데카르트 처럼 철학의 끝에 서서 인간 존재나 신의 존재를 왈가왈부 하는것 보단, 아마존의 원시부족의 행복지수가 높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인간 삶의 과정에 있어 중요한것은 행복이라는 감정의 점유율일 것이다.
난 높지가 않다. 행복이라는 감정의 점유율이 떨어진다. 원인은 인간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격성에 나는 너무 취약하다. 반응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내 몸은 그런 반응에 있어 쉬 피로해지고 즐거워진다.
어떻게 보면 마르커스 아우렐리우스 왕이 가장 부럽다. 그는 이러한 행복이라는 점유율에 방해가 되는 원인으로 인간을 꼽았으며, 이 인간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트레이닝을 가혹히 수행하여 로마의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다.
나도 노력하지만 쉽게 되지는 않는다.
또한 이런식의 사고의 사고를 거듭하는 행위도 행복의 점유율은 떨어뜨리는 행위이다. 부조리를 깨닫는 순간 세상이라는 커다란 콩은 또 다른 더욱 작은 삼각형 여러개를 만들어 낸다. 내가 보는 공은 더욱 더 정밀해진다. 다양한 인생을 경험하고 철학과 지식 고정관념 가치관 등 수많은 형태의 삼각형이 각자의 특성을 가지고 공을 refinement 한다.
그럴 수록 나의 행복이 점유할 시간과 공간은 줄어든다. 삼각형이 10개일때는 행복이라는 삼각형을 쳐다보기가 쉽지만 삼각형의 갯수가 많아질 수록 전체적인 행복 삼각형의 점유율은 떨어지고, 어디 있었는지 찾기도 어려워 진다.
또한 절망적인 것은 새롭게 생겨나는 삼각형의 속성이 기본적으로 부조리 속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더욱 부조리라는 시스템을 발전시키므로, 인간의 사고가 exponential하게 증가하는 이 세상은 점점더 부조리로 가득차게 되고, 그 세상을 경험하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부조리 속성의 삼각형을 많이 가지고 있는 구를 쳐다 볼 수 밖에 없다.
신이 만든 이 세상은 어떻게 보면 원래부터 부조리 시스템으로 설계되었는지도 모른다. 부조리 시스템이 무한 속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평등이 가지고 있는 나른함을 신은 이겨내지 못한 것이었을까?
어쩔 수 없이 설계자가 부조리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이세상에서 부조리를 탓한다는것은 인간이 왜 폐호흡을 해야 하는가 라고 묻는것과 다를 바 없다.
결론은 자유경쟁 체제와 부조리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답. 바로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인생의 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난 좀 더 노력해야 한다.
내 인생의 삼각형은 아직 30%도 만들어 지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 행복이라는 속성을 가진 삼각형이 늘어나는것은 분명하다. 돈과 집착은 부조리 속성을 가진 삼각형이다.
구는 수많은 삼각형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어.떤. 구.의. 삼.각.형.을. 볼.것.인.가.!!!
간단히 이야기 하면 이런 예를 들 수 있겠다.
한 반의 아이가 50명인데, 다들 열심히 공부한다. 열심히 공부를 하지만 성적은 1~50등까지 나누어진다. 내신을 기준으로 대학을 간다면 결국 열심히 하는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이 잘 하는 사람이 대학에 진학한다.
뭐 시쳇말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이런 말이 부조리를 상당히 잘 표현하는 말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1등만 기억한다고 처벌이나 법적인 제제를 받지 않는 상황 이것을 부조리한 상황이라고 카뮈는 이야기 하고 있다.
회사라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비밀무기로 한 인간 집단들 속에 소속된지 어느덧 5년 6개월이 넘어가고 있다.
회사라는 곳은 철저히 부조리가 만연한 곳이다. 카뮈는 부조리와 싸우는것 자체가 인생이라고 했는데, 어찌그리 정확하게 지적한것인지...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는 소위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회사다. 다른 회사는 경험을 하지 않아 모르겠으나, 두번다시 어떠한 회사의 형태도 접하고 싶지는 않다.
회사에서는 철저히 부조리한 운영체계를 가지고 있다. 절대로 처벌은 없다. 자연도퇴될 뿐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이 자연도퇴되는 대부분의 구성원은 열심히 일한다. 자신의 전성기 에너지를 다 뽑아내어 기득권의 양분으로 가공한다.
기득권들은 누구나 기득권이 될 수 있다라는 자유경쟁체제를 내세우며 부조리한 시스템의 정당성을 강조한다.
결국 부조리 시스템에서 법적인 처벌이 불가능한 자유경쟁 패배자는 생겨나게 마련이며, 이 숫자 또한 기득권의 숫자대비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이다.
그럼 바꾸어 생각해보자 내가 기득권이 된다면, 솔직히 모르겠다. 정당한 기득권이 될려고 할것이지만, 나역시 장담하지 못한다. 나 또한 기득권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이 0%라고는 할 수없으니, 하지만 5%가 안된다고는 장담한다....-_-; sorry~
오늘도 한바탕 이기주의를 바탕으로 수많은 이와 보이지 않는 전쟁을 펼치고 온 마음에 상처를 안고 귀향한다.
이 전쟁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끝날때 대부분의 병사는 패전병이 될 것이다. 부조리 시스템의 부산물이다 이것을 없엘 수 있는 화확적인 방법은 없다.
난 그렇게 예언한다. 예언이 아니지... 어쩔수 없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내가 미국 대통령이라도 이건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지금 나의 현 상황은 대다수 한국인에게는 기득권에 가까운 위치에 있다고 판단 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기득권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 자신에게 충실한 자아야 말로 부조리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임을 알면서도 부조리에 몸담고 있는 내가 불쌍해 보일 뿐이다.
세상은 커다란 구와 같다. 3D Graphics의 컨셉에서 보면 구는 수많은 삼각형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작은 삼각형이 모여있을 수록 완벽히 구처럼 보인다. 무한대의 개념이 잘 탑재되어 있는 것이다. 무한에 가까워 질수록 정제된 구가 탄생한다.
지식과 경험과 나이가 늘어나면서 구는 점점더 정제된다. 즉 인생의 다양함을 알게되고 보게되고 느끼게 된다.
세점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삼각형은 내가 쳐다 볼 수 있는 하나의 반사체일 뿐이다.
난 우리의 삶이 커다란 인생이라는 구를 쳐다보는 것이며, 그 쳐다보는 화면이 시시각각 변한다고 생각한다.
처칠이 말했듯이 낙관주의 말고는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칸트나 데카르트 처럼 철학의 끝에 서서 인간 존재나 신의 존재를 왈가왈부 하는것 보단, 아마존의 원시부족의 행복지수가 높다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인간 삶의 과정에 있어 중요한것은 행복이라는 감정의 점유율일 것이다.
난 높지가 않다. 행복이라는 감정의 점유율이 떨어진다. 원인은 인간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격성에 나는 너무 취약하다. 반응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내 몸은 그런 반응에 있어 쉬 피로해지고 즐거워진다.
어떻게 보면 마르커스 아우렐리우스 왕이 가장 부럽다. 그는 이러한 행복이라는 점유율에 방해가 되는 원인으로 인간을 꼽았으며, 이 인간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트레이닝을 가혹히 수행하여 로마의 위대한 왕이 될 수 있었다.
나도 노력하지만 쉽게 되지는 않는다.
또한 이런식의 사고의 사고를 거듭하는 행위도 행복의 점유율은 떨어뜨리는 행위이다. 부조리를 깨닫는 순간 세상이라는 커다란 콩은 또 다른 더욱 작은 삼각형 여러개를 만들어 낸다. 내가 보는 공은 더욱 더 정밀해진다. 다양한 인생을 경험하고 철학과 지식 고정관념 가치관 등 수많은 형태의 삼각형이 각자의 특성을 가지고 공을 refinement 한다.
그럴 수록 나의 행복이 점유할 시간과 공간은 줄어든다. 삼각형이 10개일때는 행복이라는 삼각형을 쳐다보기가 쉽지만 삼각형의 갯수가 많아질 수록 전체적인 행복 삼각형의 점유율은 떨어지고, 어디 있었는지 찾기도 어려워 진다.
또한 절망적인 것은 새롭게 생겨나는 삼각형의 속성이 기본적으로 부조리 속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더욱 부조리라는 시스템을 발전시키므로, 인간의 사고가 exponential하게 증가하는 이 세상은 점점더 부조리로 가득차게 되고, 그 세상을 경험하는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부조리 속성의 삼각형을 많이 가지고 있는 구를 쳐다 볼 수 밖에 없다.
신이 만든 이 세상은 어떻게 보면 원래부터 부조리 시스템으로 설계되었는지도 모른다. 부조리 시스템이 무한 속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평등이 가지고 있는 나른함을 신은 이겨내지 못한 것이었을까?
어쩔 수 없이 설계자가 부조리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이세상에서 부조리를 탓한다는것은 인간이 왜 폐호흡을 해야 하는가 라고 묻는것과 다를 바 없다.
결론은 자유경쟁 체제와 부조리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답. 바로 진정한 자아를 찾는 인생의 구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난 좀 더 노력해야 한다.
내 인생의 삼각형은 아직 30%도 만들어 지지 않았다.
*책을 읽으면 행복이라는 속성을 가진 삼각형이 늘어나는것은 분명하다. 돈과 집착은 부조리 속성을 가진 삼각형이다.
구는 수많은 삼각형을 가지고 있다.
당.신.은. 어.떤. 구.의. 삼.각.형.을. 볼.것.인.가.!!!